이 책에 반하다. 5화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김숨 지음)

by 망초

지금도 우리 주변에 생존해 계신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소설이다.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의 증언집이라고 밝혀져 았듯이, 1928년생 평양 출생 길원옥 님의 아픈 삶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의 한 장면을 직면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 김숨의 개입은 거의 없는 듯하다. 구순이 넘으신 길 선생님의 구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고향 평양과 위안소가 있던 만주, 아기를 데려다 기르던 부천 자유시장, 그리고 지금의 쉼터를 한 마리 새가 되어 넘나들고 있지만, 독자의 이해를 어렵게 하기보다 길 선생님의 인생 여정을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고, 더 나아가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자문하게 한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때에 따라서 아무 기억이 안 나다가 별안간 기억이 날 때가 있어.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 질렀어.

“누나 – 빨리 갔다 와!”


아무에게도 이야기 안 할 줄 알았어.


세상 사람들은 우리말도 믿지 않으려고 했어.

열서너 살이던 우리 몸에 군인이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씩 다녀갔다는 걸.

아이를 갖지 못하게 수은을 먹이기도 했다는 걸.

자궁을 들어내기도 했다는 걸.


나는 일흔한 살이 되어서야 말을 했어.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세상에 꽃이 안 피는 데가 없다는 것밖에 몰라.

세상에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밖에 몰라.


우리 집 주소는 평안북도 평양시 서성리 76번지

우리 아버지 이름은 길창봉.


작은 애야

아버지가 밥을 드시다 말고 나를 부르고는 했어.

아버지 왜요? 하고 내가 가면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조밥을 헤치고

그 밑에 있는 쌀밥을 퍼 내게 먹였어.


누가 들어오네.


그런데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데도 집에 안 보내 줬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도.

주인이 미웠어, 너무 미웠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은 날도 군인을 받았어.


나 자고 싶어.

엄마, 나 잘게.

나 말 안 하고 싶어.


내가 열세 살이라는 것밖에 몰라.


가다가다 잊어버려서

세상을 살 수 있었어.


요시모토 하나코…… 그 이름은 안 잊어버렸어.

누가 지어주었는지 기억 안 나…… 군인들이 나를 그렇게 불렀어.

뜻은 없을 거야. 아무 뜻도 없을 거야.

뜻도 없는 이름이 안 잊히네.


누가 나보고 몇 살이냐고 물으면 열세 살이라고 했어.

그때 내 나이가 열세 살.


그만 가고 싶어.

그만 끝났으면 좋겠어.


나 우리 집 갈래.

우리 집 주소가 평안북도 평양시 서성리 76번지 26호.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말 안 했어.

말하면 아픈 데가 더 아파.


어떻게 하면 잊을까

그 생각만 했어.

부끄럽냐고?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부끄러운 거야.


사람이 무섭지?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무섭지?

사람은 사람을 해치니까.


말이 무서워.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서워. 사람이 뭐가 무서워.

사람이 하는 말이 무섭지.


군인이 내 치마를 찢었어.

생리 때는 나를 내버려 두겠지 했는데 생리 때도 군인을 방에 들여보냈어.

생리 피가 묻어 요가 벌겋게 되었어.

요를 접어 가면서 군인을 받았어.


해방됐다고 했어.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어.


집이 갖고 싶어 따라갔어. 집을 부수는 남자인 줄 모르고.

사람만 집을 부수지.

새들은 자기 집을 부수지 않아.

집을 부수는 남자를 만나 살면 꽃이 피는지도 몰라.

꽃을 보면서도 꽃인지 몰라.

아기를 낳으면 아기가 집이 되어줄 것 같았어.

그래서 아기가 갖고 싶었어.


나는 나를 사랑해서 죽지 않았어.


내가 나를 사랑해야 용서도 할 수 있어.


나를 사랑하는 거…… 그것이 시작이야.


그리고 말해.


군인들이 천사가 될 때까지.


우리는 어쩌다 자식이 없을까


세상에 왔다 아픈 일생을 살고 가네.


나는 혼자 민화투를 쳐,

그게 내 직업이니까.


다 잊었는데

안 잊히는 게 있어.

“누나 – 빨리 갔다 와!”



202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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