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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Aug 16. 2023

더 이상 할 일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별난 사람의 여행

가게 문을 열고 나와 골목을 따라 걸었다. 어디로 걷든 괜찮았다. 두세 개의 갈림길에서는 어디가 그늘이 조금 더 있는지, 어디를 가보고 싶은지를 보고 걸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그곳이니깐. 또 나에겐 배터리가 충분한 핸드폰과 지도앱이 있으니깐. 막다른 골목이나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변이 나오면 지나온 몇 발자국만 물리면 되었다. 길 걷다 꽤나 삐까번쩍한 건물이 YG엔터테인먼트라고 적혀 있어서, 라탄 공방이어서, 유리창에 붙은 말이 작당모의여서 사진을 찍었다. 가게마다 걸린 태극기를 보고 광복절을 기념하며 찍었다. 펄럭이는 태극기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씩씩했다. 밥때 아닌 시간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는 곳, 가게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면 지도에 저장해 두었다. 오늘의 날씨도 중얼거린다. 최저온도 25도와 최고온도 32도인 입추와 처서 사이. 백팩에 땀은 차지만 양산이 있다면 걷기 나쁘지 않은 날.


눈길 닿는 대로 보고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계획 없음이 주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둘레길처럼 따라 걷는 길도 좋지만 누비는 길은 더 좋구나’ 하며 같은 골목을 반복하지 않고 골목골목 안으로 자꾸만 숨어 들어갔다. 아니, 점령해 갔다. 걷다 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전에 와본 적 있는 가게를 뒤늦게 알아채는 걸로 보아 다시 온대도 어느 골목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상관없었다. 이건 할 일이나 하게 될 일로 분류되지 않은 순수 행위일 뿐이니깐.


나는 어느새 끼니도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되어 눈뜨고 감을 때까지 먹고, 쉬고, 자는 게 일처럼 엄격해졌다. 누구와 어디서 뭘 먹을지(선호)부터 시작해서 식사 시간이 너무 늦어서도 빨라서도 안되고(금지), 먹는 속도는 적당한지, 어느 순간에는 같은 장소에서 먹는 사람들이 대체로 어떤 체형인지까지 확인하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씩 매일을 금지, 선호, 선택 등 세부 기준으로 번잡해졌다. 밥을 먹는 순간에는 분풀이하듯 먹어치우기 바빴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든 때부터 몇 시간을 자야 할지 늘 깨는 시간과 졸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커피를 마셨는지 세부지침이 작동하자 불면과 기면으로 이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었겠다. 24시간을 할 일로 만들어놓으니 허탈했다. 책상 위의 스탠드가 스위치 누르면 불 들어오고 꺼지는 것처럼 사회적 기준인지 내 안의 기준인지도 모른 채 할 일을 해내기 바쁜 내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해방구가 하릴없는 시간에 있을 줄이야.


그저 낯선 곳을 둘러보는 데에는 편견이 끼어들지 못한 시간이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다. 30분이면 걸어가는 옆 동네였다. 길목 걷는 시간에서 나는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당장 출근길과 사무실에서, 점심시간과 오후시간까지 보내다 보면 어느새 골목을 걸었던 가벼움과 멀어지겠지만, 같은 공간을 생소하게 느낄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이마저도 할 일에 추가하려 든다면 그저 하릴없는 순간으로 기분전환 할 수 있단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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