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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Feb 06. 2024

불행을 말해야 할 때

대화의 단서

마치 딴 세상 얘기처럼 느껴지는 말들이 있다. 각자 다르지만 하나쯤은 있는 말. 이질감이 들거나 별 감정 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말. 내게는 불행이란 단어가 그랬다. 의미도 알고 반대말도 알지만 한 번도 원해보지 않았거니와 피할 노력의 대상조차 아녔던 말. 무심함의 영역에 있던 말이 '불행'이었다.


의식하지 않았단 말이지 불행없었단 게 아니다. 나와 관계한 많은 일에 불행으로 태그하면 엮어 나올 기억이 줄줄이다. 듣는것 만으로도 고단해서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불행을 잘 몰랐다. 오면 당해주고 가면 보냈을 뿐 언제 불행해지는지, 왜 불행한지 몰랐다. 문득 불행이란 두 글자를 떠올렸을 때 호기심은 일었지만 육하원칙의 꼬리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놓아지지 않는 이 단어는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파도가 밀려오듯 맞이하라는 선언처럼 등장해서 사라지지 않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쓰게 됐다. 내가 아는 불행은 이처럼 끝을 보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조금 더 정확한 방법은 불행은 말하고 나야만 끝난다는 거다. 이 불친절한 주장은 최근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  장면이 환기한 나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고로 절친한 친구를 잃었지만 애도조차 할 수 없던 사람이 있다. 왜냐면 그녀 때문에 친구가 사고 현장에 갔기 때문이다. 그 개연성은 죽은 친구의 가족으로부터의 원망과 죄책감을 정당화했고 그녀는 그 불행에 대해 수 년을 미안하다는 말 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일지 모르는 용서의 순간까지 그립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게 떠오른 기억은 달랐으나 결국 그녀처럼 어쩔 도리가 없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지키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시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들어주거나 말리거나 화해를 편들거나 할 뿐이었다. 그때 불행은 불안과 공포, 무력감으로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아무리 용써도 용케 이 불행은 지속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두통에 몇 시간만 시달려도 신경이 곤두서고 괴로운데 년이고 삼 년이고 계속 아프면 어떨까. 십 년이면 무뎌질까. 십 년을 사과하던 사람은 계속 사과만 하게 되던데. 삼십 년을 때맞춰 밥 먹으면 그때마다 배고프던데. 몸도 마음도 행위의 반복 같더란 말이다. 시간이 지나다보면 반전이 생기긴 했다. 지지든 볶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죄책감이 사라진 게 아니다. 무력감과 공포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단지 고통스럽지만 부딪혀야하는 상황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자로 보니 알았다. 붙잡는 게 훨씬 이로운 기회였단 걸 말이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말은 마치 불행의 실체에 소금을 뿌리고, 말의 그림자를 휘갈기듯 성토한다. 참아왔던 말을 하는 순간 눈물부터 나고, 소리가 나오다 말아 쇳소리로 되고, 결국 말이 아닌 악다구니만 남는 건 불행에 갇혀 잃어버린 말이 잔재로 남은 형상 같다. 같은 상황을 겪어본 나는 그녀의 성토, 그녀의 주저앉음, 그리고 당황해서 미쳤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상대의 어벙벙한 표정까지 단박에 이해했다.


상대도 아는 것 같다. 그 분노는 그가 아니라 오랜 침묵 속에 눌러앉아 사라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은 불행에게 하는 말이란 걸. 그래서 상대도 참아온 슬픔을 향해 끝까지 소리친다. 오가는 고성 속불행이 쫓겨났다. 오래 묵은 불행이 그제야 끝났다. (싸움으로 불행을 끝냈다는 이 말은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 뒤로 나는 여전했다. 불행을 모르고 다. 싸우는 데 소질이 없거니와 침묵은 기에 불행을 인지하지 않는 쪽으로, 행복만 자주 좇았다. 그러다 생긴 질문이었다. 이제는 언제, 왜 불행해지는지 알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묻는다. 모를 뿐 없지 않은 불행의 쓸모 같다. 동시에 살 길도 내어준다. 불행할 땐 말하면 된다고, 불행한 대상에게 외면 말고 그저 말하면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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