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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심 Feb 01. 2021

나는 돈 버는 아내가 좋다

30-3.

  , "며느라기"라는 담백한 그림체의 짧은 연재 웹툰을 읽은 적이 있다. 고구마 100개를 먹은  같은  답답함을 쓸어내리며 읽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웹툰의 주인공인 '민사린' '며느라기' 고충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웹툰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책으로 옮겨졌고, 최근에는 드라마가 되어 방영되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가 서서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겠다.  


2016년쯤이었던 것 같다. 어느 정치인이 선거 유세를 하다가 "설거지는 여자들이 하는 "이라 했었다.  말은  입방아에 올랐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여론이 좋지 않자, 그는 맞벌이를 하는 여성을 제외한 주부들이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정정했다. 선거 유세를 하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말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직도 가끔 설거지를 하다  말이 떠올라 피식 웃고는 한다.


나는 설거지를 무척 좋아한다. 주방 창문을 열고 뜨거운 물에 뽀드득뽀드득 접시를 닦는 일은 때로는 하루 일과의 마무리이기도 하고,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맞벌이 주부지만, 대부분의 설거지를 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 정치인의 발언 이후로, 남자들의 설거지에 대한 생각은 나에게 어떤 척도가 되었다. 설거지는 여자들의 몫, 또는 맞벌이를 한다면 반반이라고 외치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척도.




때는 바야흐로 2016년, 서른 살의 내가 여러 번의 소개팅을 하면서 잔뜩 지쳐있을 무렵이었다. 스무 살부터 알고 지낸 지인이 고백을 해왔다. 어느 발라드 노래의 가삿말처럼 처음 본 순간부터 너를 좋아해 왔다고, 네가 미국에 있었던 긴 시간 동안 너를 많이 생각해왔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그의 고백에 덩달아 내 가슴도 떨렸다.


멋모르던 시절에 오빠 동생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라 거창한 자기소개가 필요 없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그렇게 두어 달 정도 흘렀을 즈음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나보다 네 살이 많던 남자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내게 소개했다. 첫 만남은 동네 호프집에서였다. 어르신은 내가 마음에 쏙 드신다며 아들 녀석이 10년 전부터 네 얘기를 한 것을 아냐며 드디어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하셨다. 그리고 헤어질 때쯤 취기가 오르신 어르신은 내게 "우리 며느리 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활짝 웃으셨다. 그렇게 남자친구의 아버님은 아들보다 내게 먼저 프러포즈(?)를 하셨고, 그만큼 34살 외동아들의 결혼을 기다리시는 듯했다.



그 날 이후, 우리의 만남에는 어른들의 기대와 결혼이라는 주제가 들어왔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시작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어른들의 기대 덕분인지, 남자친구의 오랜 짝사랑 기간 때문이었는지 짧은 연애 기간에도 불구하고 결혼 이야기는 급물살을 탔다.




나는 다시 또 한 번 선 또는 소개팅을 나갔을 때처럼 결혼 후의 삶에 대한 내 생각을 질문받았다.  


결혼 후에도 일을 할 생각이야?  


그가 내게 물어왔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저 대화의 물꼬를 틀기 위해 물었을 것이다.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었겠으나,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결혼 후에 내가 일을 안 했으면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그날 우리는 사람 많은 카페에서 다퉜고, 그는 내게 고집불통이라면서 일어섰다. 집에서 살림하는 아내가 자신의 오랜 로망인데, 좀 들어주면 안 되냐고 말하는 그가 떼쓰는 어린애 같아 보였다.


그의 로망인 줄로만 알았던 내조하는 아내가 그의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음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의 다툼 끝에 내가 이별을 고하자, 그는 내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며 용서를 구했고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채 이어졌다. 화해하면서 일단락되었는 줄 알았던 결혼 후 직장 문제는 다시 만나면서도 계속되었고, 이번에는 남자 친구의 아버지께서 나를 직접 만나 설득하셨다. 당시 중견 기업을 운영하시던 어르신은 아내의 내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거듭 강조하시면서 아내가 남편을 뒷받침할 때 가정이 평화로울 수 있다며 곧 기업을 물려받을 당신의 외아들을 내조해 줄 것을 부탁하셨다.  




처음에는 의견의 차이일 뿐 서로 의견을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가치관의 차이이자 삶의 태도에 대한 차이이기도 했다.


결혼해서 일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누리고 살 수 있는데 일하고 싶어 하는 며느리 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맞벌이는 형편이 어려울 때나 하는 거지 남의 밑에서 왜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는 남자친구와 나는 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지쳐갔고, 좋아했던 감정도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서른 살에 찾아온 인연은 결국 무너졌다. 헤어지고 아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내가 원하는 삶과 결혼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었다.


간혹 가다 직장이 대수냐, 좋은 신랑감이었는데 양보하지 그랬냐고 말하는 이들에게 기분 상하기도 했지만 의견의 차이겠거니 한 귀로 흘려버렸다. 나는 직장을 포기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잃는 것이 싫다. 언젠가는 일을 그만둘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남편과 시댁 덕에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월급쟁이의 삶이 뭐 그렇게 좋냐고 한다면, 그 말도 맞는 말이라 반박은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결혼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그 결혼이 잘못되었을 때는 또 한 번 삶이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나는 여전히 돈 버는 아내가 좋다.  



*이미지 출처: The World of a Classy Lady,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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