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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Apr 09. 2022

쓰다 : 김호연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인생의 모든 어려움이 글감이며, 죽지 않고 살았다면 그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
      -바버라 애버크롬비, <작가의 시작>-



 아직 대학생이던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몸 담고 있던 문학반 선배 중 한 명의 신춘문예 등단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있었다. 나이 차가 좀 나는 선배였다. 85나 84 정도? 술이 좀 들어가 불콰해진 선배에게 술자리 누군가가 덕담으로 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냐고 말을 건넸다. 선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엄근진 모드로 말을 꺼냈다.

 '쓰지 않을 때가 더 힘들었어. 안 쓰고는 도저히 못 배기겠더라고. 그래서 썼어. 나야 운 좋게 감투를 얻게 됐지만 쓰면 누구나 작가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버티지 말고 그때  쓰면 돼.'


 허세 섞인 말이 분명한데도 그땐 왠지 선배의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낭만적이고 멋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린 난 선배의 모습을 보며 작가는 태어나는 거고 그 운명을 살아가는 거라고 믿게 된 것도 같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참 어울리지 않는 작가에 대한 정의이긴 하다. 길든 짧든 좋은 글이든 아니든 쓰는 인간은 사방에 넘쳐난다, 인스타와 페북에, 그리고 이곳 브런치에도. 그러니 작가로 태어난 자신을 언제든 발견하고 쓰게 된다는 선배의 말은 지금 와서 보면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다.

  


  새로운 경험이 줄어드는 나이가 되고부터 때를 놓친 애도의 시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찬란하고 따뜻했던 한 줌 기억은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놈의 흐릿하고 텅 빈 상실감의 기억은 자꾸 나를  쓰도록 채근했다. 써서 그 순간들을 다시 살아내고 기어코 기록하라고. 예전 선배의 말처럼 쓰지 않아서 혹은 못해서 점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숙제를 미룬 아이처럼 애가 타고 조바심도 났다. 이러다 무병에 걸린 사람처럼 대차게 앓지 싶었다. 나만의 굿이 필요한 타이밍이 온 것이다.

 그래서 각 잡고 써보기로 결심했다. 뭔가 끄적거리다 만 하찮은 글들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하지만, 끝맺지 못 한 이야기들을 어디다 써먹겠는가. 난 이야기의 콘셉트를 새로 잡고 기억을 쫓아 허기진 맘으로 이야기를 지어 보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치했던 글쓰기 근육은 탄력을 잃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글감에 살을 입혀 매끈한 서사구조를 만들고 싶었던 희망사항도 희망사항일 뿐이어서 현실의 결과물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이삼 개월에 걸쳐 주제 하나를 붙들고 주경야서(晝耕夜書)하며 써낸 건 겨우 열 꼭지 정도의 장르도 불분명한 자전적 이야기였다. 기대에 크게 못 미쳤지만 혹시나 하는 맘으로 글 몇 개를 추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해보았다.

 

 속전속결. 24시간도 안돼 시무룩 금지의 메시지와 함께 브런치 운영팀으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시무룩해졌다. 글을 쓰지 못해 아플 줄 알았는데, 글만 쓰면 그걸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두 번째 브런치 작가 신청에서 다행히 합격 통보를 받아 이렇게 난 쓰고 있고 당신은 읽고 있다(끝까지 읽어주시길). 쓰면 작가라고 은연중 믿고 있던 난 왜 만만치 않은 통과의례를 굳이 자청했을까? 작가 신청이란 진입장벽을 뚫고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인정과 상찬이 없으면 작가는 탄생했어도 늘 불안하고 낙담하는 존재란 말인가? 도대체 답이 없을 것 같은 작가에 대한 이런 삐딱한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요즘 들끓고 있는 중이다.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소위 잘 나가는 소설가 두 명의 글쓰기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가 담긴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됐다. 첫 번째 책은 <대도시의 사랑법>이란 연작소설로 무려 부커상 후보에 오른 박상영 작가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였고, 연이어 읽게 된 에세이는 김호연 작가의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란 책이었다. 김호연 작가는 시나리오와 소설을 이십 년간 뚝심 있게 계속 써온 작가다. 작년엔 <불편한 편의점>이란 소설로 소위 대박을 터뜨려 인기 작가의 반열에도 올랐다.

김호연,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두 작가의 인기 소설은 이미 섭렵했다. 문체나 다루는 주제는 서로 판이하게 다르지만 자전적 에세이에 드러난 작가로 등단하기까지 고진감래의 시련은 샴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공모전이란 공모전에선 죄다 낙방해본 경험, 키친테이블 라이터(kitchentable writer)-일과 병행하며 퇴근 후나 출근 전에 자신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고단한 삶 등이 소위 성공'할' 작가의 루틴인 양 둘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김호연 작가는 나와 비슷한 또래여서 작가로 생존하기 위해 버텨온 삶의 연대기가 더욱 눈물겹다. 특히 두 번에 걸쳐 직장을 뛰쳐나와  전업작가로 도전했으나 뚜렷한 결실 없이 바닥까지 무너져간 모습은 우리가 전업작가에 대해 가지는 환상이 얼마나 철없는 것인지 느끼게 해 줬다. 무엇보다 전업작가로서 철저한 고립을 찾아다니며 창조성을 유지해야 하는 무지막지한 미션은 작가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 주는 듯했다. 김호연은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글쓰기는 곧 생활이었다. 삶의 전 부분이 글쓰기와 닿아 있고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전업 작가의 생활이었다......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인생 전체로서의 작업, 그것이 창작자의 삶이자 예술가의 숙명이다." 



 

김호연 작가는 또래라는 사실 외에 나와 닮은 구석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는 시나리오 공동작업을 통해서 만난 많은 동료를 인연의 끈으로 단단히 묶어두고 작가로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 그들로부터 힘을 얻었다. 또한  출판사 직장생활을 통해서도 문우와 인생의 멘토를 만났고 그들을 첫 데뷔작의 캐릭터로 생생하게 부활시켜 놓기도 했다.

 창작자로서 SF와 호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관심을 기울이고 창작활동을 해왔지만, 정작 그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긴 작품은 <망원동 브라더스>와 <불편한 편의점> 등으로 대표되는 따뜻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네 이웃들의 이야기이다. 대중적인 이야기라고 해서 모두 성공한 작품이 되고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성공은 작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구석구석 모든 감정의 진폭을 오가며 성실하게 쓰고 살아온 그의 삶의 태도가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결국 글에 깊이와 진정성을 더해줬을 것이고 뒤따른 성공의 열매는 작가라는 무간지옥의 생태계에서 여전히 그를 버티고 살아게 한 게 아닐까.



 다시, 작가란 무엇인지 묻고 싶어진다. 작가로서의 20년 생존기가 고스란히 담긴 김호연의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끝까지 읽고 나 작가 됨에 대예전 선배의 말이 그래도 반쯤은 진실이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했던 박상영 작가나 김호연 작가는 분명 쓰는 일에 매료되고 속절없이 끌려가는 자신을, 그래서 남들과 다른 자신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그 다름으로 살아갈지 말지를 영화 매트릭스(Matrix) 속 네오처럼 그들은 양자택일,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의 대가로 고립 속에서 쓰린 기억을 쓰고 때론 새로운 이야기를 지으며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버텨 스스로 하나의 작가가 되었고 이름을 알렸다.  


 작가가 무엇인지, 글쓰기란 또 무엇인지 이 글을 마무리해가는 지금도 알듯 모를 듯 결국 모르겠다. 작가는 영어로 'writer'이기도 하지만 'author'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권위 그리고 권위를 부여하다의 뜻을 지닌  'authority' 'authorize'의 뿌리가 되어 준다. 이 영단어들을 통해 우린 예전 영어를 쓰던 사람들이 가졌을 작가에 대한 생각의 단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작가란 책으로 담긴 하나의 이야기 속 모든 인물과 사건들을 통제하고 전개시키는 권위를 가진 창조주로서 여겨졌던 것이다.  


 '쓰다'라는 것은 고립과 함께 만들어 낸 세계의 완성을 바라보는 창조주의 행위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과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한 후 제7일, 흐뭇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한 구약 성서 속 창조주는 작가가 감히 바랄 수 없는 경지이다. 작가에게 진짜 중요한 순간은 한 번의 빛나는 창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다시 쓰고 고쳐 쓰고 마침내 끝까지 써야 하는 무한반복의 루프 속으로 자신을 기꺼이 던져야 하는 용기 속에 있을 테니까. 


 그래서 오늘도 작가는 쓰고 또 쓰며 그 맛은 가끔 달다가 계속 쓰다. 그럼에도 어딘가 숨어 있을 찰나의 희열을 찾아 글쓰기라는 암담한 갱도 아래로 뚜벅뚜벅 내려가고 있는 수많은 유명, 무명의 작가 동지들의 그 대책 없음을 항상 응원하겠다. 그리고 또 기꺼이 응원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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