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도의 막장처럼 암흑의 심연까지 끌려왔다한들, 우리 삶에 남겨진 선택지가 적어도 둘 이상이라면, 그 또한 자유에 다름 아닐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이십 대 후반부터 서른 살까지 삼 년을 꿋꿋이 버티며 다니던 나름 번듯한 회사를 그만두고 일 년 동안 배낭여행을 떠났다. 엄밀히 말해 자발적으로 그만뒀다기보다 희망퇴직 혹은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알아서 눈치껏 나간 거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그 과정에 희망은 없었고 명예도 지키긴 더더욱 힘들었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빌미로 부서별 감원에 대한 쿼터와 신청 기한만 정해준 후 누가 그 인원에 포함돼야 하는지는 알아서 결정하도록 하는 비정한 방식을 택했다. 가위바위보를 하든 제비뽑기를 하든, 아니면 마음 약한 누군가가 알아서 그만두든 부서에서 알아서 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속한 부서에는 연봉이 나보다 훨씬 많을 게 분명한 부장과 과장도 있었지만 내가 그만두기로 했다. 나만 빼고 다 정규직이었으며 기혼이었고 다들 바쁜 척 일을 잘했다. 난 회사가 외국 자본에 팔려 사장도 외국인으로 바뀌면서 영어 통번역 업무 등 잡다한 일을 담당하기 위해 계약직으로 입사를 한 상태였다. 거기다 미혼이었고 남 보기 좋게 일을 잘 펼쳐놓고 하는 타입도 아니라, 바쁜 척도 못 했던 것 같다.
계약직이라 퇴직 위로금 같은 돈뭉치는 따로 얹어 주지 않아도 되니 답정너의 분위기 속에서 회사는 내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순순히 나가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걸 부서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테니 내 선택과 희생을 기다리며 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왠지(아니 당연히) 억울했고 소심한 반항이라도 하고 싶어 충분히 부서 사람들의 오금이 저리도록 신청 기한을 꽉 채워 난 절망적이고 불명예스럽게 퇴직 의사를 밝혔다. 부장은 내 두 손을 생전 처음 따듯하게 꼭 감싸 안고 고개까지 끄덕이며 ‘잘 결정했고, 고맙다.’란 말을 어색하게 꺼냈다. 웬만해선 아랫사람에 대해 칭찬이나 위로를 할 줄 모르고 오직 살아남기 위한 줄타기와 유흥에만 진심이던 부장도 밥그릇을 지켜주는 나의 결단 아닌 결단 앞에서 후안무치하진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회사를 나오고 얼마 안 돼 별 준비도 없이 비행기에 올라탔다. 세계일주를 하고 싶었지만 주도면밀하지 못하여 일 년 동안 열심히 길을 잃어 가며 느릿느릿 아시아만 겨우 떠돌아다녔다. 사실 난 가슴속에 담아둔 다짐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IMF로 어학연수도 못 가고 어설프게 해외여행을 잠깐 하고 왔던지라 서른 전에, 그러니까 청춘이란 이름이 시들기 전에 세계여행을 꼭 하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길에 오르고 첫 몇 달은 몸도 맘도 적응이 안 돼 힘들었다. 낯선 사람들이 걸어오는 말도 내가 그들에게 거는 말도 모두 어색하고 피곤했다. 밀려서 길 위를 떠돌고 있다는 열패감이란 독소가 쉬 빠져나가지 않아 여행의 그 순간에 집중하기 힘든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을 난 넘어선다. 모르겠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박에 얻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벗어나지 않고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나를 담그고 있다 보니 천천히 독은 빠져나갔고 맘은 보드라워졌다. 그리고 또 천천히 사람들을 향해 맘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좀 더 가벼워진 맘으로 유목민처럼 배낭을 풀었다 쌌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며, 때론 혼자 길 위를 떠돌았다.
파키스탄의 훈자(Hunza)에서 함께 길 위를 헤매고 다녔던 친구들이 물어 왔다. 내처 세상 끝까지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왼쪽으로 왼쪽으로 한 번 더 가보자고. 미련이 남지 않게 갈 데까지 가보고 돌아오자고 부추겼다. 지난 여행과는 다르게 내겐 시간이 결정을 막아섰다. 더 먼 곳으로 일 년을 더 떠돈다면 돌아왔을 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곳에서 ‘정상’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시간이 기다려줄까. 편입되어 ‘누구나’의 삶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아닐까, 난 망설였고 두려웠다.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 속 주인공 펀(Fern)은 나와 정확히 반대 지점에서 가족과 친구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길 위의 삶을 거두고 정착하는 게 어떻겠냐고. 펀은 길 위를 떠돌게 된 이유가 뭐가 됐든 그 삶에서 자신의 잃어버렸던 야성(野性)의 부름을 받고 진실의 조각을 발견한 이상 그럴 순 없었고 다시 길 위로 돌아간다.
결국 난 펀과 다르게 계속 가지 못하고 한국으로, 궤도 밖에서 혼자 돌아왔다. 일자리를 알아보고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나만 떨어져 돌아서던 그날에 대한 미련과 자책이 당연하게도 내 뒤를 스토커처럼 오랫동안 밟아왔다. 어떤 날은 끝까지 가보지 못한 길이 굽이굽이 이 먼 곳까지 나를 찾아와 아직 기회가 있다고 나를 설득하며 술잔을 기울게 만들었다.
파키스탄 훈자(Hunza)
길 위로 밀려난 유목의 삶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길과 선택,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의 끝과 그 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속 프랜시스 맥도먼드(Frances McDormand)가 연기한 펀(Fern)은 60대에 접어든 미망인이다. 뻔한 삶에 유일한 온기였을 남편이 죽고, 금융 위기에 따른 자본의 냉혹한 결정으로 안정적이었던 직장 엠파이어(Empire)마저 잃게 된 그녀는 이제 베드타운(bedtown) 안 볼품없고 조야한 집조차도 떠나보내야 한다.
남은 건 'Vanguard(선구자)'라 이름 붙인 낡은 중고차 한 대. 그 안에 길 위를 떠도는 삶에 필요한 간단한 가재도구와 추억이 깃든 몇 가지 물건들을 싣는다. 그리고,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황량한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쓰디쓴 상실감과 함께 길 위에 들어선다.
아직 익숙지 않은 낯선 시간 속 펀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다니고, 웅크린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손길을 애써 뿌리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마음을 다해 웃고 슬퍼하며,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길 위에서 만난 같은 듯 다른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혹은 허름한 펍을 다 함께 점령한 채 온 힘으로 노래하며 춤춘다. 어느 시간엔, 홀로 남겨져 텅 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석양을 관조하고, 뒤척이던 밤을 뒤로한 채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난다.
화면 가득 끝없이 이어지는 낯선 땅과 무심의 바다 그리고 늘 단단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들이 지나쳐 가고, 어느 순간 읊조리듯 낮게 흘러나오는 펀의 흥얼대는 노래 한가락. 가슴 한편이 저려오다, 불현듯 영화는 상실과 슬픔의 고개를 갸웃 넘어선다. 그렇게 펀과 함께 나도 진짜 길 위에 들어선다.
영화 <노매드랜드> 속 주인공 펀(Fern)
HOUSE가 아니 HOME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영화는 금융위기로 직장을 잃고 길 위를 떠돌며 궁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듣기 처연하고 난처한 후일담만을 늘어놓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심장인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라는 구호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는다. 연대는 있되, 핏대 세운 선언은 없다. 수다와 소란스러움은 있되, 소요나 뜨거운 분노는 없다.
그것이 낙담하고 뒤처진 자들의 자기 연민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폄훼할 수 없는 이유는, 실뿌리처럼 연약하고 쉽게 밟힐지라도, 길 위 곳곳 홀로 또는 함께 버텨내고 살아낸 그 흔적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흩어지기는커녕 겹겹이 쌓여 영화가 끝나가는 지점에 이르러 따뜻하고 단단한 '홈(Home)'이 되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온다. 잊히지 않고, 버려지지 않은 그 모든 이름들로 단단하게 쌓아 올린, 꽤 근사한 우리들의 '홈'은, 펀뿐 아니라 영화 속 등장인물들(연기자가 아닌 스스로를 보여준 사람들) 모두의 '홈(Home)'이 되어준다.
영화의 가장 빛나는 장면 중 하나는 영화 초반 펀이 삶의 터전이었던 엠파이어를 떠나기 전, 한때 임시교사로 가르쳤던 어린 제자를 우연히 만나 나눈 짧은 대화가 아닐까 싶다.
어린 제자 : 선생님 이제 홈리스라고 하던데, 맞나요?
펀 : 난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하우스리스(houseless)란다. 그건 다른 거잖아? 그렇지?
자신은 하우스(House)를 버리고 홈(Home)을 찾으러 길 위에 나섰다는 것을 마지못한 변명이 아닌,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 말하는 펀의 표정과 반문은 스크린을 넘어 나에게도 물어왔다. 정말 그렇지 않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