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그러니까 열 살은 넘었지만 여전히 어렸던 시절,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와 '누구야 놀자~!'라고 내 이름을 부르면, 어린 나이에도 생각이 늘 복잡했다. 부름에 응하게 되면 아이들과 하는 일이란 뻔히 정해져 있었다. 하릴없이 주인 없는 무덤들 사이를 찾아다니며 봉분 위에서 방방 뛰어놀게 될 것이었다. 그도 아니면 수풀을 헤치며 뱀이나 개구리를 찾으러 다니게 될 것이었다. 뱀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일제히 돌을 집어 들어 던지고는 줄행랑을 치며 깔깔대곤 했다.
이런 소일놀이들이 소년들의 사교 활동이며 '정상'적임의 징표로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냥 그런 시간들이 불편하고 싫었다. 하지만, 거부하기도 또한 쉽진 않았다. 별난 아이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한두 번쯤 아이들로부터 꽁꽁 숨어 보았다. 그리고 충실히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내 방식대로 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널따란 집 근처 바위에 드러누워 빠르게 혹은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 '장엄'이란 표현을 그때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낮게 읊조렸을 것이다. 기묘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구름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온전히 내게만 바쳐진 새로운 세계처럼 보였다. 나만의 세계에서만 오롯이 느껴지는 그 놀라운 충만감은 한번 닫힌 문을 더더욱 굳게 안으로 잠그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후로는 아이들과 수풀을 헤치고 다니는 일은 하지 않게 됐다.
이런 내 모습에 엄마나 아빠는 걱정에 찬 말들을 하곤 하셨다.
'넌 사람을 정말 싫어하는구나.' '네가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지 걱정이다.'
난 부모님의 걱정과 기대에 부응하기로 한 듯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럴싸하게 섞여 보려 했다. 성공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면서 까슬까슬하던 내 말과 행동들은 뻔하고 지루해져 맨들맨들해져 버렸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고립 속에서 가장 편안한 자신과 대면하는 '가면을 쓴 도시의 은둔자'들은 우리들 사이사이 도처에 어쩌면 웅크린 채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속에서 늘상 말이 없고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 내향적인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일 거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타인에 대한 불신을 숨긴 채 적당한 사교술을 익혀 그들과 어쨌든 함께 살아간다. 그러다 힘들게 얻은 고립의 시간을 움켜잡고 다시 버틸 힘을 얻어 낸다. 타인이란 지옥을 겪기 위해 다시 자신을 버릴 용기를 길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혼자 있음이란 즐거움과 괴로움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가장 당연하고 충만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끊임없는 고독과 고립에 대한 열망을 숨긴 채 상처받으면서 사람들 사이를 불안하게 걸어가고 있다.
타협을 택한 대다수의 세상 속에 던져진 (은자의 생채기를 유전자에 품고 있는) 우리들과 가장 먼 저 끝, 대척점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완전한 충만감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타인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고, 스스로 지옥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숲 속으로 들어간 한 사나이, 숲속의 은둔자라고도 알려졌던 크리스토퍼 나이트(Christoper Knight)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 보고 싶다.
크리스토퍼 나이트(Christoper Knight), 완벽한 고립을 꿈꾼 사나이
책 <숲속의 은둔자>, 마이클 핀클, 2018
<숲속의 은둔자>는 크리스토퍼 나이트라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성인이 되고 잠깐의 직장생활을 거친 후, 완벽한 고립을 택해 숲 속에서 27년을 홀로 살았다. '고독'이라는 표현보다는 '고립'이 그에게는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 같다. 고독이라는 단어에 깃들어 전해지는 낭만적인 정서나 서사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인간과의 접촉으로부터 그저 완벽하게 벗어나, 인간의 사회가 의지와 상관없이 그에게 엮어준 관계로부터 자발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도망쳐 나왔다. 이별을 기념하는 환송회도 눈물로 얼룩진 편지 한 통 없이. 즉, '세상'에 존재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대출금 상환도 끝나지 않은 새 자동차를 몰고 여기저기 한동안 떠돌다 기름도 현금도 모두 바닥이 나자 미련 없이 자동차 중앙 계기판 위에 열쇠를 올려놓고, 미국 북동부에 자리한 메인주의 호숫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27년 간 홀로 지낸다.
완벽한 혼자임에 대해 감사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홀로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 속에 '완벽한 자신'에 대한 진실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 속에서 지워지기를, 잊혀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논픽션 작가인 마이클 핀클(Michael Finkel)은 크리스토퍼 나이트와의 편지글과 몇 번의 면담,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희미하게 선을 댄 몇 명의 지인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한 끝에 <숲속의 은둔자>라는 책을 출간한다. 물론 크리스토퍼 나이트의 허락 하에. 언론을 통해 핀클은 27년간 메인 주의 노스폰드 호수 주변에 있는 캠핑장과 오두막 집들에서 천 건이 넘는 좀도둑질을 한 혐의로 구속 수감된 현대판 은둔자 크리스토퍼 나이트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작가 스스로도 은둔자의 삶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아온 터라 단박에 그를 취재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고, 27년간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떨어져서 살아온 21세기의 로빈손 쿠르소의 삶을 파헤쳐보기로 결심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 흐릿해지는 경계
크리스토퍼 나이트의 야영지
'<월든>을 쓴 데이비드 소로는 진정한 은둔자가 아닙니다.' 나이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기대를 품거나 성숙을 꿈꾸며, 조화로운 삶을 위한 잠정적이고 한시적인 자연에로의 숨어듦은, 적어도 나이트에게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여가 활동일 뿐이다. 삶의 골수를 하나하나 빼먹고 경험하기 위해, 소로가 불러낸 수많은 고유명사들과 소박한 노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활동일 뿐, 자신과 같은 수준의 고립과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처럼 나이트는 느꼈다.
그렇다면 나이트는 인간의 사회와 철저하게 단절된 채 스스로 생존을 꾸려나가고 절대적 고립 속으로 침잠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사회를 버리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수많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훔쳐냄으로써 생존을 이어갔다. 27년 동안의 천 번이 넘는 좀도둑질은 고립 속에서 생존을 선택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보일 수밖에 없는 가장 부도덕한 모습이었으며 미련 없이 등진 사회가 결국
그를 찾아내게 만든 미끼가 되고 만 것이다.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 도둑질을 완벽하게 수행하던 젊은 날의 크리스토퍼도 나이가 들고, 보안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소한 흔적도 단서가 되어 결국 덜미를 잡히게 된다. 그가 잡힌 뒤 공개된, 숨어 살던 야영지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은자의 거처는 아니었다. 비록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나 식량은 아니지만, 숲 속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갖가지 물건들이 야영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메인주의 혹독한 숲 속 겨울은 인간이나 그들 사회가 만든 어떤 제도나 신념에도 무심하던 그를 신과 연결시켜 놓는 불경스러운 일을 가능케 하곤 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영하 20도가 넘는 지독한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는 뱀이나 곰처럼 웅크려 오직 생존 하나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며, 동사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극한의 고통과 깨어 마주해야 했다. 의식이 흐려질 듯한 지독한 고통의 지경에 이르면, 결국 나이트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신은 어떤 계시나 은총도 그에게 내려 주지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계산하고 버텨내야 하는 것은 철저히 나이트의 몫이었다.
< p. 185 : 새벽 2시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스토브에 불을 때서 눈을 녹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피가 돌게 하려고 그는 야영지 둘레를 걸었다.
"텐트 밖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돌아요. 열다섯 걸음. 또 왼쪽으로 돌아요. 여덟 걸음. 겨울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봐요. 뒤로 스무 걸음. 커다란 삼각형을 그려요. 다시 돌아요. 또 돕니다. 나는 서성거리기를 좋아해요." 그는 습기를 빨아들인 침낭을 환기시켰다. >
돌아온 탕아, 회개는 없다
책 <숲속의 은둔자>, 마이클 핀클, 2018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결국 30년 가까이 지속된 절도의 대가로 감옥에서 7개월을 보낸다. 은둔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정리가 되지 않은 겉모습을 한 채 감옥이라는 사회 속에서 자신을 힘겹게 지켜낸다.
석방이 되고 세상 속으로 다시 내던져진 나이트를 가족들은 호들갑 떨지 않고 맞아준다. 소소한 일자리도 얻어 그는 겉보기에 '정상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작가인 핀클은 나이트가 다시 돌아간 사회 속에서 감정적인 불안을 겪으며 극심한 공포와 매일매일 싸우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트에게 생존 방식에 대한 선택권은 더 이상 없었다. 다시 사회를 등지고 새로운 숲 속 야영지를 만들어 은둔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소한 흔적마저 지우고 싶어 하던 그에게, 세상은 '노스 폰드의 은둔자(The North Pond Hermit)'라는 그럴싸한 꼬리표를 달아 그를 세상에 꽁꽁 묶어 두었다. 매스미디어의 관심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경계의 눈빛으로 흘끗거렸다. 또 다른 일부는 경외심과 호기심으로 그를 열망했지만 어느 쪽도 나이트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귀되지 않는 영원의 시간 속으로 사그라지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한겨울 수도 없이 숲 속 야영지에서 마주했던 '숲의 여인'을 이번에는 스스로 찾아갈 것이라고 작가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말한다. 그에게 남은 한 줌의 자유의지란 신탁에 의지했던 연약한 고대의 인간처럼 '그녀'의 인도를 따르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 279 : "나는 '숲의 여인'과 함께 걸어갈 거예요." 그는 늘 이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나이트는 스스로 대단히 난감한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야영지로 돌아가 자유를 찾게 되면 감금될 터였다. 그는 '안도감을 느끼고 껴안고 받아들이기'를 열망했다. 조사를 좀 해보니 저체온증이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인 듯했다.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
책 속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작가는 나이트가 숲 속으로 들어가 자살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할까 노심초사하며 그를 주시하지만, 끝내 그 계획을 실행해 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상태로 이야기를 끝마친다. 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서커스 무대에 올라선 한 마리 힘없는 사자로 남은 생을 산다한들 그의 실패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자기 자신이 되는 뜨거운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가 전해 준 영감은 그의 위대한 실패로 인해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사회가 정해 놓은 블록에 스스로를 욱여넣으며 살아가고 있는 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타협하고 좌절하며 극복하고 다시 상처받는 무한 루프 속에서 살아가지만 크리스토퍼 나이트로 인해 우리들은 알게 된다. 우리 또한 내가 나일 수 있는 장엄한 순간을 실현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존재이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삶이 아직은 긁지 않은 복권처럼 서랍 한구석에 앉아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