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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Apr 16. 2022

1996 : 김광석 VS 구광석 #02

03. 호우(好友)시절 그리고 뜻밖에 강릉 04. 아침의 총성 05...

03. 호우(好友)시절 그리고 뜻밖에 강릉

 

 1996년 봄이 지나면서 구광석과 나 둘 다 병장 계급장을 달았어. 운 좋게도 둘 다 병장을 달자마자 행정반 왕고가 됐지. 그때부턴 거리낌 없이 서로의 중대를 왔다 갔다 하며 더 친하게 지냈을 거야. 우린 고향이 전남이라는 거 외에도 엄청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믿기 힘들 정도의 개발(dog foot)로 태어나 대표적인 중대의 축구 소외 인구로 살아가고 있다는 축복이었어. 


 주말 오후만 되면 땡볕 아래 연병장에서 우르르 개떼처럼 몰려다니며 공을 차는 군바리들을 보고 있자면 측은지심이 먼저 드는 아싸의 성정을 우린 둘 다 가지고 있었어. 난 쉬는 날이면 늘 내무반이나 행정반 구석 아니면 야외 그늘에서 베짱이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지. 그러다 심심해지면 어느새 끊임없이 조잘대는 수다스러운 배짱이가 된 지 오래인 구광석을 불러 그늘이 진 대대 연병장 스탠드로 향했어. 함께 스탠드에 걸터앉아 3대대 공식 짝퉁 김광석답게 구광석은 ‘부치지 못한 편지’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같은 내 신청곡을 기타 반주와 함께 불러주기도 했지. 

 병장을 달고 그해 봄부터 초가을까지가 내 군생활의 화양연화이자 호우(好友)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어. 제발 뭐가 됐든 사고만 터지지 말고 이대로 조용히 보내다 전역하는 그날이 온다면 이 X 같았던 군생활 26개월도 가끔 추억의 이름으로 소환해주리라, 인심 쓰듯 다짐하곤 했지.      


 

1996년 강릉 무장공비침투 사건 잠수정

 전역을 한 달여 남겨둔 1996년 9월 18일 수요일 새벽 5시쯤 화기 소대 내무반 스피커로 요란한 사이렌이 울려 퍼졌어. 하절기 기상 시간인 6시를 한 시간이나 앞두고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사이렌 소리에 처음 든 생각은 5분 대기조였지. 화기소대에 5분 대기조가 있었나? 난 의아해하며 말년 병장답게 느릿느릿 일어나 눈을 비비면 뭔 상황인가 하고 둘러보고 있는데 당직사관이 후다닥 내무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TV를 틀더라고.

 ‘잠수정을 이용해 강릉 해안으로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했습니다. 강릉과 춘천 지역 일대에 현재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상태입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X 됐다!     

 TV에서는 해안가에 좌초된 잠수함 한 척을 보여주는 영상을 배경으로 남자 아나운서가 긴박한 목소리로 이것은 실제 상황이며, 그래서 진돗개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라고 강조하듯 반복적으로 무장공비 침투 소식을 전하고 있었어. 잠시 후 중대장의 목소리가 내무반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어. 

 ‘십오 분 내로 완전군장 상태로 중대 연병장에 집합한다. 소대별로 챙길 물품은 소대장 지휘 하에 준비한다. 교육계는 중대장실로 바로 튀어 온다. 나머지 행정병들은 행보관 지휘에 따르도록. 이상’

 전쟁이라도 터진 것인가. 아, 진돗개 셋이라면 준전시 상황이니 전쟁이 맞긴 맞나 보네. 허허실실 중대장이 저렇게 비장한 톤으로 말하는 건 또 처음 보니까. 겁이 나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어. 


 중대장은 날 보자마자 대대 상황실로 가서 이동 섹터(sector)를 지도에 떠오라고 명령했지. 정신없이 이동식 훈련 상황판과 투명 셀로판지 그리고 유성펜을 챙겨서 대대 상황실로 내려가 작전 장교를 찾았어. 구광석을 비롯한 중대 교육계들이 이미 모여서 작전 장교의 지시에 따라 빨간 네임펜으로 이동 섹터를 따고 있었어.     

 음, 미리 스포 좀 하자면 이게 부대에서 구광석을 보게 되는 마지막 순간이었어. 물론 그걸 그때 알았더라도 달리 어쩔 순 없었겠지만,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괜한 자책과 아쉬움이 몰려오긴 해. ‘힘내자’ 라거나 ‘다치지 말자’ 같은 상투적인 인사라도 했더라면 조금은 덜 미안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대대 본부는 마치 야전(野戰) 상황이라도 되는 듯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우린 서로 눈인사 정도만 하고 후다닥 지도를 건네받아 섹터를 뜨고 각자의 중대로 향해야만 했지. 중대장에게 작전 지역의 이동경로가 표시된 훈련 상황판을 건네주고 그제야 난 정신없이 군장을 싸고 K-1 소총을 챙겨 각 중대가 이동해 모여 있는 대대 연병장으로 향했어.    

  

 아직 채 해도 뜨지 않은 희뿌윰한 새벽의 대대 연병장. 거뭇한 실루엣의 장병 수백 명이 연병장 가득 중대별로 도열해 있었지. 그 옆으로는 사람과 탄약 그리고 물자 등을 실어 나를 호루(방수포)가 발 빠르게 덮인 육공트럭도 쭉 늘어서 있었어. 우리 중대 쪽에 도착하고 보니 병들은 이미 실탄이 들어간 탄창을 건네받고 있더군. 그리고 언뜻 솔방울 크기의 동그란 것도 하나씩 건네받는 중이었는데, 세상에나, 그건 다름 아닌 세열수류탄! 실물 영접은 훈련소 이후 처음이라, 이거 진짜 ‘머나먼 정글’ 찍게 생겼구나, 하는 두려움이 피부로 바로 돌진해 오더라고. 제대 한 달 남은 말년 병장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고 했거늘, 낙엽이 아니라 빗발치는 총알과 포탄을 피해야 살아서 제대를 하게 생겼으니, 아, 이건 꿈일 거야, 볼을 꼬집고 깨어나고 싶은 심정이었어.     

 

육공트럭으로 이동 중인 군인

 


 육공트럭을 타고 몇 시간에 걸친 아침 이동 끝에 우린 강릉에 도착했어. 이동 중 중대장으로부터 강릉 해안에 좌초된 잠수정을 버리고 탈출해 근방 칠성산 쪽으로 도주한 스무 명이 넘는 무장공비들을 수색 및 소탕하는 게 작전 내용이란 얘길 들었어. 

 이런 젠장! 그 많고 많은 부대 중 왜 우리 부대가 하필 가장 먼저 픽 된 거냐고?! 아, 그 망할 태권도 유단자가 많은 사단이라고 국방일보며 여기저기에 기회마다 자랑질하더니 겨우(?) 오늘을 위해서였던 거였어?! 육탄전 상황이 발생해도 더 잘 싸울 거 같아서 1순위로 픽 당한 거? 그거 다 오핸데...... 참 이주 뒤에 잡아놓은 9박 10일의 내 소중한 말년휴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휴가는 됐고 다음 달 말일에 제대는 시켜주는 걸까? 

 머릿속은 죽음에 대한 공포 사이로 짜증 섞인 이런 푸념과 걱정들까지 가득 차서 강릉으로 오는 내내 내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어. 더 절망적인 건 작전 기간이 앞으로 며칠이 될지, 아니면 몇 달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거였어. 무장 공비를 마지막 한 명까지 다 잡지 못하면 끝나지 않는 데스게임이었던 거지. 제발 이 난리통이 북한과의 전면전으로 번져 제대도 못하고 몇 년간 한국판 '머나먼 정글'을 찍는 끔찍한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라는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까지 들더라고. 


 아무튼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적과의 실제 교전 상황이 현실로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득 안고 강릉의 칠성산으로 나와 부대원들은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중대장이 시키는 대로 칠성산과 그 주변을 낮에는 수색, 밤에는 매복을 반복하며 일주일 정도를 보냈더니 추석날이 되었어. 그래도 추석이라고 과자랑 떡이 든 특식 박스가 헬기에서 작전지역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지만, 이 생사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칠성산 작전지역에서 먹는 추석 특식에서 뭔 맛이 느껴졌겠어. 그래도 살아는 보겠다고 꾸역꾸역 돌덩이처럼 굳은 송편 조각을 은폐, 엄폐해가며 먹고 있는 날 보자니 급 현타가 오더군. 

 아,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나 말년 병장 맞아?, 같은 생각이 들면서 억울하기도 하고 말이야. 만약 부대였으면 말년 병장답게 내무반에 자빠져 누워 TV를 보면서 여유 있게 특식을 먹고는 달콤한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을 텐데. 그도 지겨우면 9중대로 마실 가서 구광석이랑 시시껄렁한 잡담에 담배나 피우면서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고! 그냥 한숨만 나왔지 뭐. 

    

 추석도 지나고 공비들의 예상 이동 경로에 따라 우리 부대도 이리저리 작전지역을 바꿔 가는 중이었어. 새로 투입된 곳에서 야간 매복을 위해 산 중턱에 참호를 파다 보면 가끔 전날이나 며칠 전에 있었던 공비와의 끔찍한 교전의 흔적이 보이곤 했지. 근처 나무들의 몸통이나 둥치를 파고든 수십 발의 총탄 자국들이 그것이었는데, 처음엔 나를 빗겨 간 비극에 두려움과 감사함이 함께 느껴졌어. 그런데 어느 순간 총탄 자국 익숙해지더니 체념이 찾아들더군. 

 내가 살아보려고 눈을 부릅뜨고 사방 경계를 한들, 찾아들 비극이 방향을 틀고 나를 비껴갈 리도 없고 비극이 날 선택한 거라면 받아들이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겠단, 서늘한 체념 같은 것 말이야. 

 그렇게 날 살려둔 운명을 껴안고 반복된 수색과 매복에 지쳐갈 때쯤, 그 일이 일어났어구광석에게.      


04. 아침의 총성

 

 무장 공비 소탕 작전에 우리 부대가 투입된 지 이주 일 정도가 지나자, 장교고 사병이고 할 것 없이 심신이 너덜너덜 지쳐갔어. 잔뜩 긴장했던 밤샘 매복이 끝나고 아침이 되면 그제야 온몸이 쑤셔 오고 졸리기도 하면서 비몽사몽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일쑤였지. 

 그날 아침도 졸린 눈을 비비며 밤새 특이사항이 없었는지 중대장과 함께 각 참호를 돌아보기 위해 나서려던 참이었어. 우리 중대장이 나름 육사 출신 FM, 그러니까 원칙주의자여서 혼미한 나를 보며 잊지 않고 아침에 하는 말이 있었어.

 ‘총 조정간 안전으로 바꿔놨어?’

 사격훈련 때 말고는 총에 실탄이 장전될 일이 없던 중대원들은 이동할 일이 생기는 아침이면 총의 조정간을 단발에서 안전으로 바꿔놔야 하는 걸 자주 깜빡했어. 특히 작전이 수행되는 곳이 경사진 산비탈이어서 오르내리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총이 땅에 부딪혀 격발될 수도 있으니, ‘조정간 안전’은 꽤 중요한 아침 루틴이긴 했어.      

 조정간을 안전으로 이동시킨 걸 확인한 후 중대장과 난 첫 번째 참호를 향해 걸어갔어. 몇 걸음이나 뗐을까. 갑자기 근거리에서, ‘탕’, 한 발의 총성이 들려왔어. 총성의 방향으로 봐선 우리 중대 참호는 아닌 거 같은데, 어디지? 무장 공비가 나타난 거야 뭐야?! 두려움이 확 끼쳐왔어. 중대장도 당황했는지 통신병을 불러 무전을 치면서 한참 동안 상황을 파악하더라고. 전해오는 무전을 듣고만 있던 중대장이 ‘아이고’, ‘저런’과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의외로 심상한 표정을 지으며 무전을 끝마쳤어. 따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소대장들이 중대장 쪽으로 모여드는 게 보였어. 중대장은 상황 파악이 안 돼 동공지진 중인 날 흘끗 보더니 한마디 아니 두 마디 툭 던지더군.

 ‘공비 아냐. 9중대 교육계가 다쳤다네.’     

 중대장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광석이?! 뭐가 어떻게 된 거라고? 그리곤 곧 알게 됐지. 넘어지면서 소지하고 있던 K1 소총에서 발사된 총탄에 구광석의 중지 바로 아래쪽 손바닥이 관통되는 부상을 입었단 걸 말이야. 


K1 소총

 당시 교육계 행정병들은 중대 보병들에게 보급되는 K2 소총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볍고 총신이 짧은 K1 소총을 보급받았어. 길이가 짧다 보니 총을 어깨에 메고 이동할 때는 자연스럽게 손바닥 중앙이나 중지 아래쪽이 총구와 맞닿게 되거든. 그래서 실탄이 장전된 채 넘어지면 총알이 손바닥을 먼저 관통하고 나아가게 되는 거지. 구광석도 그날 아침 FM과는 한참 거리가 먼 9 중대장과 정신없는 상태에서 아침에 참호를 둘러보러 나섰다가 변을 당한 거였어. 누굴 탓해 봤자 다 소용없는 짓이긴 해도, 9 중대장이 한 번만 ‘조정간 확인’이라고 외쳐줬더라면 그런 끔찍한 사고는 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원망이 지금도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     


  사고가 있고 일주일쯤 됐을 때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는 일도 없이 여전히 뭘 하든 설렁설렁 중인 9 중대장을 지나면서 우연히 만나 광석이는 괜찮은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 

 ‘봉합수술 잘 됐다던데?’

 남 얘기하냐?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일단 다섯 손가락으로 살아갈 수 있다니 다행이다 싶었어. 그런데, 곧장 심란한 질문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나에게 물어 왔어. 광석이의 배 만드는 꿈은?, 기타? 떠오르지 않는 답을 품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야간 매복을 위해 난 다시 참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어.      


 공비 소탕 작전은 구광석이 부상을 당한 후로도 한 달 가까이 더 진행됐고 그 와중에 공비뿐 아니라 우리 쪽 장병과 민간인까지 수십 명을 죽고 다치게 한 후에야 마무리됐어. 마무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긴 해. 죽은 건지, 월북한 건지 알 수 없는 한 명의 공비는 결국 찾지 못했으니까. 찝찝해도 더이상 수만 명의 병력을 계속 작전에 투입할 수 없어서 중단했다고 표현하는 게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네. 초가을에 시작된 6·25 이후 최대의 육·해·공군 병력이 투입된 무장 공비 소탕 작전이 만추에 다다라서야 설익은 채 끝을 맺은 거야.    

 

말년휴가는 날아갔어도 제대는 제대로 시켜준다는 육군본부의 감사한(?) 결정에 따라 난 입대 동기들 몇 명과 텅 빈 부대 주둔지로 전역을 며칠 앞두고 복귀했어. 혹시나 제대가 미뤄지지 않을까 똥줄 타며 중대장의 똥 묻은 빤스를 차가운 산 개울물에서 박박 닦고 있다 행보관으로부터 등짝 스매싱과 함께 전해 들었지.

 ‘뭐 하냐? 부대 복귀! 어여 가서 더블백 싸야!’

 복귀라는 행보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치더니 눈물이 나오려고 하더라고. 겨우겨우 흐르는 것까진 막았는데 속에선 한동안 감정의 격랑이 거칠게 계속 소용돌이쳤어. 북적북적한 시장통에서 길 잃은 아이가 엄마를 겨우 찾게 되면 이런 감정일까 싶기도 했지. 집으로...... 이제 똥 묻은 중대장 빤스 안 빨고, 조마조마해 가며 밤새 매복 안 서도 된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반이었다면, 근원을 가늠하기 힘든 슬픔과 허탈, 미안함과 원망이 또 다른 반이었어. 

 당연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목숨을 건 잔인한 통과의례에서 살아남은 듯 기뻤지만, 홀로 돌아가는 내 모습이 결코 자랑스럽지도 당당하지도 않았거든.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전리품처럼 날 따라붙는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더블백에 꾹꾹 함께 눌러 싸서 난 마침내 부대로 복귀했어.    

 

 전역 전날까지 방치된 부대 관리(잡초 뽑기)를 열심히 하다 10월의 마지막 날 홀로 위병소를 빠져나왔어. 중대원들의 도열 속에 행정병 후임들이 준비한 선물을 증정받으며 ‘고맙다. 너희들과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 전우들아, 사랑한다! ’ 같은 으리으리하고 닭살 돋는 멘트를 못 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살아 있으니 됐다, 다치지 않았으니 됐다, 라는 말로 스스로를 칭찬하고 위로하며 형과 함께 H군을 빠져나왔어.

 전역 후에도 한동안 뉴스에 무장 공비 관련 뉴스가 나올 때면 긴장되곤 했어. 그리고 늘 가시처럼 쿡쿡 찌르는 이름 하나가 되살아나 나 스스로에게 두서없이 이런 질문을 하고 또 혼자 답하곤 했어. 


 ‘그래서, 광석이는? 광석이는 제대 잘했나? 잘 이겨내겠지? 아마 그럴 거야, 내가 아는 광석이는 분명히!'

     

05. 다시 구광석

 

 내가 졸업하기 전이니까 1998년 무렵의 여름이었을 거야. 종로에 약속이 있어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다 놀랍게도 객차 안 한쪽 구석에 가방을 메고 서 있는 구광석을 우연히 봤어. 광주나 목포가 아닌 서울에 살고 있구나, 배 만드는 일은 정말 힘들어진 건가, 같은 생각들이 서둘러 머릿속으로 뛰어들었어. 그리고는 속으로 갈등했지. 가서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러시아워가 지나서 드문드문 서 있는 사람들 틈 사이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않고 구광석을 볼 수 있긴 했어.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친 오른손은 한여름인데도 흰 장갑을 끼고 반쯤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던 구광석은 검게 지나쳐 가는 창밖의 어둠만 텅 빈 눈으로 한참이나 꼼짝 않고 응시하고 있었지. 1996년 봄부터 가을까지의 밝고 수다스럽던 구광석의 표정은 분명 아니었어. 어두워 보였고 화가 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 


 물론 내가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혹시 그 반대로 내가 잊고 있던 트라우마를 다시 떠올리게 할까 봐 두려웠어. 저 텅 비고 음울한 표정으로라도 버티고 있는 광석이가 내가 말을 거는 순간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소환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적 격랑으로 다시 빠져들면 어쩌지? 호우(好友)시절은 먼 기억이 되었고 비극과 생생한 상처로만 남은 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나의 말들이 분명 광석이는 반갑지 않을 거야...... 

 이런 두려움 섞인 변명들이 결국 내가 구광석에게 다가가는 발길을 붙들어 매고 놓아주지를 않았어. 아니, 그냥 싹 다 변명이고,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았어. 나만 살아남은 거 같은 대단한 자기혐오까진 아녀도 그냥 부채 의식 같은 게 있었나 봐. 운명의 주사위 아래 나 대신 죽고 죽이고 다치는 임무를 수행한 그들을 대신해 저기 서 있는 구광석을 피하지 않고 목도하기엔 용기가 안 났던 거야, 겁쟁이처럼. 

 결국 난 약간은 슬프고 겁에 질려 뒤돌아서 옆 칸 객차로 이동했지. 그리고 종각역에서 내렸고, 출구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며 슬쩍 구광석이 서 있던 칸을 쳐다봤어.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눈이 서로 마주친 것 같기도 해. 축 처진 광석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계단 위로 사라져 가는 날 눈으로 쫓아오려는 듯 몸을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인 것 같기도 했거든.     


 구광석을 마지막으로 본 날로부터도 벌써 이십여 년이 흘렀네. 이제 반백 년을 살아낸 아재로서 광석이를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면 난 절대 피하진 않을 거 같아. 사람 고쳐서 못쓴다고들 하잖아. 난 그 얘길 좀 더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고 싶어. 사람이 겪는 고난과 시련이 그 사람인 건 아니니, 결국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이지. 내가 아는 구광석은 낙천적이고 낭만을 알던 친구였으니 지금쯤이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있겠지? 음악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깃털처럼 가볍게 깔깔거리며 웃고 수다를 떨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있을 반백의 광석이가 그립고 또 보고 싶네.      

 나의 호우(好友)시절, 광석아. 당당하고 뻔뻔하게 잘 살아주라. 더 이상 아프지 말고. 물론 나도 그럴 테니......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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