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내 군 생활의 마지막 해, 1996년의 새해가 밝아왔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날 괴롭히던 W 병장도 새해의 시작과 함께 부대를 떠났으니 1996년은 그야말로 고생 끝,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한 해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런데, 예상치 못한 우울한 소식이 새해 벽두부터 전해져 왔어.
나른한 시간이 흐르던 1월의 첫 토요일 오후, 중대 교육계 행정병이던 난 행정반에서 잡무를 보다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정훈병으로부터 전해 듣게 된 거야, 김광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교통사고나 병이 아니라 목을 매 죽었다니, 더 큰 충격이었지. 많은 칠십 년대 초반 베이비부머들에게 그러하듯, 내게도 김광석은 단순히 노래 잘하는 가수 그 이상의 존재였어. 뭐랄까, 내 우울과 불안의 친구였으며 또 위로와 감동의 원천이기도 했단 말이지.
김광석은 내가 다니던 대학의 축제나 이러저러한 행사 때 여러 번 와서 노래를 불렀을 거야. 90년대 대학의 축제 분위기랑 아주 찰떡인 가수였거든. 노찾사 출신이기도 하고, 레퍼토리도 말랑말랑한 사랑 노래부터 민중가요까지 그 스펙트럼이 엄청 넓었으니까. 게다가 노래 중간중간 무심한 듯 나른하게 던지는 멘트 또한 위트작렬이라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 같아.
하지만 김광석이 내게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생애 처음으로 가본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야. 1994년 8월 중순쯤이었을 거야. 입대가 약 이 주정도 남았을 때, 형이 입대 선물(?)로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여주겠다고 하더군. 둘만 가는 건 아니고 형의 여친과 셋이서 말이지. 대학로의 ‘학전’이라는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콘서트였던 걸로 기억해.
원래 ‘첫’이 붙는 일들엔 늘 야릇한 흥분감이 감돌기 마련이잖아. 거기다 김광석을 꽤 좋아해서 동물원 시절은 물론 솔로로 활동하면서 발표한 앨범의 카세트테이프도 없는 돈에 꼬박꼬박 사 모았으니 나에게 ‘첫’ 콘서트로 김광석은 안성맞춤이었던 거지. 김광석 특유의 비음을 타고 전해져 오는 멜랑콜리, 속이 뻥 터지듯 치고 올라가는 두성에 실린 고음의 카타르시스, 그리고 ‘안녕들 하실 테죠...?!’와 같은 괴괴한 인사를 밀착된 공간에서 듣게 된다니 꿈인가 싶었다니까.
대학로 샘터 사옥
주말 저녁이었겠지, 아마도. 붉은 벽돌과 그 위로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넝쿨이 인상적인 대학로 소극장 거리의 랜드마크이자 시그니처인 샘터 사옥 뒤쪽에서 형과 형의 여친을 만났어. 형보다 훌쩍 큰 키에 흰 얼굴과 높은 콧날을 가진 마른 체형의 평범한 누나였던 걸로 기억해. 우리 셋은 공연 전에 뭘 먹으러 갈지 잠깐 고민을 한 뒤 근처 돈가스집으로 향했어.
‘청진 씨,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돈가스는 좀 소박하다, 하하하’
뭔가 시큰둥해 보였던 형과는 달리 형의 여친은 달뜬 목소리로 계속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어. 불안은 늘 포장하고 감춰도 뾰족뾰족 틈새 어디선가 돌출되어 존재감을 드러내는 법인가 봐. 입 다문 형, 끊임없이 재잘대던 형의 여친, 그 사이에서 뭔가 좌불안석이었던 나. 알 수 없는 불안과 불편함이 우리 셋 사이를 쿡쿡 찔러 왔지만 난 꿋꿋이 돈가스를 마지막 한 점까지 다 먹어 치웠지. 살짝 소화가 안 된 거 같긴 해도 배고파서 공연에 집중이 안 되면 큰일이지, 하는 생각에 일단 배를 든든히 채웠어.
어쨌든 그날의 김광석 콘서트는 더없이 만족스러웠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객석의 맨 앞줄에 앉아서, 난 김광석이 내는 콧김 소리나 괄약근 사이로 삐져나오는 미세한 방귀 소리마저 놓치지 않을 기세로 초집중하며 황홀감에 취해 두 시간을 보냈지.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후 난 김광석에게 더 빠져들었던 거 같아.
학전 소극장
참, TMI지만 콘서트 이후 형의 여친이던 그 누나를 입대 전 한 번 더 보게 되는데, 그땐 형의 맘을 돌려달라고 집으로 찾아와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애처로운 모습이었어. 상견례도 마치고 결혼식 날짜까지 잡았는데 뭔가 일이 틀어졌나 봐. 그렇담, 그날 아무 생각 없이 가장 즐겁고 온전하게 콘서트를 즐긴 건 나뿐이었을지도 모르겠네.
1994년 8월의 마지막에서 하루 앞선 화요일에 춘천에 있는 102 보충대로 입소를 하게 됐어. 남들 다 가는 군대니까 나도 가나보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일주일 전쯤부터 갑자기 심장이 콩닥거리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어. 할 수 있는 것도, 생각나는 것도 없어서 매일같이 안국동에 있는 정독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 늦은 오후쯤 되면 삼성 마이마이에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1집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이어폰을 꽂은 채 도서관을 나섰어. 그리고 김광석을 들으면서 종로와 광화문 일대를 무작정 걷고 또 걸었던 것 같아. 걷기 명상이라도 하듯, 걸음 하나하나,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에만 집중하며 생각과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걷고 또 걸었지.
삼성 마이마이
살다 보니 선명한 사건 사고랑은 상관없이 혼자 외떨어져 나와 기억에 박제된 장면들을 몇 개쯤 갖게 됐어. 뭐랄까, 무심코 심연의 마음 한구석을 툭, 건들고 지나간 어떤 장면들은 반드시 기억의 저장고에 오래오래 남게 되는 법인가 봐.
내겐 그중 하나가 김광석을 듣고 또 들으며 광화문과 종로 일대를 걸었던 입대 전 며칠의 기억이야. 대놓고 불안을 달래주고 위로를 해줬다기보단, 그냥 나랑 같이 걸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의 노래들이. 그렇게 며칠 걷고 났더니 심란하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 갔어. 그리고 신기하게도 담담히 상황을 받아들이고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생기더라고.
이런 기억들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김광석의 자살 소식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내겐 다가왔어. 마치 김광석이 있던 세상에서 그가 없는 새로운 유니버스로 원치 않게 갈아탄 기분이었달까. 소식을 듣고 며칠간은 온통 충격과 허탈, 분노와 슬픔의 감정이 뒤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02. 구(九)광석의 탄생
우리 부대에는 한 명의 광석이가 더 있었어. 구광석. 본명은 아니고 옆 중대였던 9중대 소속의 교육계 행정병이었는데 김광석 노래를 죽이게 잘 불렀거든. 그래서 붙은 별명이 구(중대)광석.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친구를 ‘구광석’이라는 정확한 워딩으로 지속적으로 부른 사람은 대대 작전 장교밖에 없었던 것 같아. 그래도 어쨌든 9중대 교육계를 ‘구광석’이라고 호명해준 작전 장교 덕에 새로운 광석이가 탄생한 건 사실이야.
왜소하고 마른 체격, 홑꺼풀의 처진 눈, 그리고 눈 위로 얹어진 두껍고 까만 뿔테 안경 정도가 구광석을 떠올리면 소환되는 이미지들인데, 얼핏 외모도 김광석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듯해. 확실히 다른 거라면 두피를 파고들 것 같은 악성 곱슬머리였는데 그게 마치 나 성깔 있으니까 건들지 마, 뭐 그런 무언의 표현 같기도 했어. 워낙 조용조용하기도 했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지, ‘구광석’이 되기 전엔 말이야.
내가 일병 말 호봉 정도 됐을 때쯤, 새로 부임한 대대 작전 장교가 중대 교육계 네 명과 대대 작전병까지 다섯 명을 주말 저녁에 BOQ(독신 장교 숙소)로 불러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어. 일종의 신고식(?)이었지. 작전 장교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이 중대 교육계들과 같이 이런저런 알고 보면 다 쓰잘데기없는 문서작업들이었던 관계로 원활한 삽질(?)을 위한 기름칠 정도의 시간이었다고 보면 돼.
맥주가 몇 잔 돌고 나서 뜬금없이 작전 장교가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기타를 가져오더라고.
‘누구 기타 칠 줄 아는 사람 좀 있나? 숙소에 사람들 별로 없으니까 조용한 노래 좀 하나 뽑아봐.’
이 양반 또라이? 아무리 주말이고 초저녁이지만 장교 숙소에서 기타 치고 노래를 부르다니, 이거 웬만한 짬 아니면 힘든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 하지만 뭐 어차피 누가 나서서 기타를 잡을 거 같지도 않고 해서 난 남은 맥주잔만 비우고 있었지.
잠깐의 침묵. 그리곤 뜻밖에도 9중대 교육계가 손을 번쩍 드는 걸 봤어.
‘제가 해보겠습니다...’
살짝 자신 없어 보이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데면데면한 이 술자리에서, 거기다 뒷감당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저 인간을 믿고 BOQ에서 9중대 너, 기타 치고 노래를 불러도 되는 거니? 이런 설레발 같은 남 걱정을 하던 찰나, 9중대는 퉁퉁, 무심하게 기타 줄을 튜닝하기 시작했어. 일제히 작전 장교를 비롯한 우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9중대의 손끝을 응시했지. 그리고 이어져 흐르는 기타 선율과 노랫가락은 대박스럽게도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었어. 내 최애곡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김광석의 노래를 듣게 된 이상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첫 소절만 듣고도 바로 삘이 오더라고. 와우, 9중대 이거 노래 좀 하는 녀석인데? 난 어느새 긴장을 풀고, 김광석의 콘서트장에라도 온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눈을 감고 9중대의 노래를 음미하고 있었지. 비록 목소리에 김광석 특유의 콧소리는 강하게 섞이지 않았지만 두성을 이용해 클라이맥스의 엄청난 고음도 거침없이 쭉쭉 치고 올라가는 모양새가 보통이 아니다 싶었어. 뭐, 그냥 가수네 가수!
‘짝짝짝, 와아~~’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지.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중대 3 소대장도 문 옆에서 휘파람을 불어주며 박수를 치고 있었어.
‘9중대 교육계라고 했지? 노래 죽이는데! 이거 왕 어려운 노랜데 이렇게 잘 부른다고?! 김광석 똑 닮았다야, 하하하. 널 이제 3대대의 공식(?) 김광석 짝퉁 가수로 임명하노라! 너 9중대니까, 구광석 하면 되겠네. 하하하. 너훈아 이후 최고의 짝퉁 가수의 탄생을 여러분은 지금 보고 계십니다. 구광석! 구광석!’
아니, 작전 장교, 벌써 취한 거? 나도 뭐 감격하긴 했지만 김광석이랑 솔직히 똑 닮지는 않았거든. 어쨌든 과하게 흥분하며 입을 술술 터는 모양새가 작전 장교도 나처럼 김광석 빠돌인 건 분명한 거 같더라고. ‘구광석, 구광석’을 혼자 애처로이 외치고 있는 작전 장교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학교 후배라도 되는지 3 소대장도 두 팔을 위로 쭉쭉 뻗으며 ‘구광석, 구광석’을 외치고 있었어. 차마, 동네 취한 아재들처럼 낄낄거리고 외쳐대는 둘을 따라 하진 못했지만, 9중대에게 급 호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 조용조용하고 나서는 일도 거의 없던 9중대 교육계가 이런 놀라운 비기(祕器)를 속에 품고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어.
그 술자리는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됐어. 이후 두 번 다시 교육계를 위한 영내 술자리는 없었지만 구광석을 탄생시킨 그 술자리에 대해서는 우리 교육계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지. 나중에 교육계들끼리 다 같이 외출 한 번 맞춰 나가서 노래방 가자는 제안도 나왔고, 구광석에게 기타 좀 가르쳐 달라는 교육계도 있었지. 예전엔 대대 본부에 불려 가 몇 시간씩 붙들려 있다가도 일 끝나면 헤어지기 바빴는데, 새로 부임한 또라이 작전 장교 덕분에 교육계끼리 오다가다 만나면 잡담도 하고 담배도 피우며 꽤 친밀해졌던 것 같아. 특히나 9중대가 우리 중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구광석을 마주치는 일이 많았는데, 술자리 이후에는 바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막사 뒤편 구석에 가서 담배를 같이 피우곤 했어.
각 중대 교육계들이 대충 짬이 비슷비슷하긴 했지만 구광석과 나는 특히 차이가 별로 안 나서 금방 더 가까워진 거 같아. 내가 한 달 정도 먼저 입대했나 그랬을 거야. 친해지다 보니 서로 사적인 얘기도 많이 하게 됐어. 나이도 같고 해서 둘이 있을 땐 말도 트기로 했지. 구광석은 겁나 티 나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했는데 고향이 목포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고, 전공도 특이하게 조선학과더라고. 고려 다음 조선(朝鮮)을 연구하는 학과가 아니라, 배를 건조하는, 조선(造船) 학과! 이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는데 빨리 졸업하고 기사 자격증 따서 조선소에 취직하고 싶다고 자주 얘기했어.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는 게 난 좀 부러웠던 것도 같아. 난 영창이나 군기교육대 안 가고 포상 휴가 한 번 더 받은 후에 무사히 제대하는 게 꿈이었는데 말이야, 쩝.
90년대 보급 담배 88
김광석이 죽은 그날도 짝퉁 광석이와 담배를 피우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어.
‘김광석이 죽다니, 진짜 구라 같지 않냐?’
‘진짜 슬프네......’
짧게 슬프다고만 하고 구광석은 말을 아끼더라고. 필터 가까이까지 바짝 담배를 다 태웠을 때쯤 짝퉁 김광석이 한 마디 덧붙였어.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다, 서른셋에 가버리네. 예수님도 아니고 너무하네들......’
‘또 누가 서른셋에 갔는데? 니가 좋아한 가수라고?’
내가 취조하듯 바투 다가가 묻자 마지막 한 모금 담배를 마저 내뿜고는 구광석이 말했지.
‘김현식도 서른셋에 죽었잖아. 둘 다 전설이 되긴 너무 빠르지 않냐? 씨바,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