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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May 02. 2022

길위에 Bad Bug은 없다, Bed Bug이 있을 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하여  

 아랫글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실용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베드벅(혹은 빈대)과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자세에 관한 경험적 글일 뿐이고, 당연히 옳고 그름 같은 가치판단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루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략 800 킬로미터에서 1,000 킬로미터에 가까운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을 순례자만이 걷고 이동하는 건 아니다. 경주마처럼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자도 있고, 만남이 즐거운 여행자들도 있으며,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옷이나 가방에 숨어들어 함께 움직이는 저 악명 높은 베드벅(bedbug)도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길 위 베드벅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갖가지 준비물이 권장되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 한 번 들불처럼 베드벅이 까미노(Camino) 위에 퍼지기 시작하면 어떤 강력한 살충제 스프레이도 그것들을 박멸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저 패닉이다.

  

 2015년, 마흔둘에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향하는 순례길에 나섰다.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의 국경 도시 생장(St. Jean)에서 출발하는 '프랑스길' 코스를 따라 삼십여 일 만에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10 킬로그램에 가까운 배낭을 지고 평균 20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매일 걷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온몸이 내게 제정신이냐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출발 후 사오일은 재난 상황이었다.


 사지 쌩쌩한 군바리였을 때에도 극강의 행군이라야 채 100 킬로미터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언감생심 800 킬로미터라니...... 준비 안 된 무모한 도전에 아우성치는 몸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일. 발바닥은 부르트다 찢어지고 곪다가 터지고를 반복하며 구조 신호를 보내왔다. 하지만 난 대충 후시딘과 반창고로 응급처치만 하고 몸의 신호에는 정신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그냥 걸었다. 그리고 내 발은 어느 순간 놀라워라, 곰발바닥이 되어 있었다. 인간 진화의 끝은 어디인가 궁금해하며 가파른 숲길을, 끝없는 평야와 언덕을 쉼 없이 난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이 곰의 것으로 진화하며 걷기에 훨씬 탄력이 붙었다. 길 위 하나의 점이 되어 나만 걷던 까미노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입에서도 '올라(hola)'와 '부엔 까미노(buen camino)'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걷는 속도가 비슷한 한국인 순례자 그룹이 자연스레 형성되면서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이 찾아들었다. 같이 걷게 된 그룹은 나까지 총 여섯 명에 남자 셋, 여자 셋이었고 이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따로 또 같이 길을 걷다 약속된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에서 함께 식사와 빨래 등을 해결하며 서로에게 동행이 돼 주었다. 외롭지 않아서 좋았다.


 워낙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이 많아서 길 위의 사건사고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금세 퍼져 나간다. 도난사고에서 성추행 사건까지 별의별 일들이 벌어졌다 퍼지고 시들해진다. 하지만 시들지 않고 끈질기게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건 베드벅에 대한 소식이다. 어느 알베르게에서 물렸으니 조심하라는 멸사봉공의 피드백이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등장하기도 하고 베드벅과 동행 중일 것으로 의심되는 순례자 무리와의 충분한 이격 경보가 은밀하게 돌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행은 괜찮았다. 여자 동행들이 워낙 깔끔하고 주도면밀해서 숙소에 도착하면 곧장 침구류를 꼼꼼히 들쳐보고 스프레이를 뿌려대는 통에 주변 순례자들의 엄지척이 자주 날아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뭐 유비무환(患) 아니겠는가, 싶었다.  

 그렇게 초반의 빡센 구간을 잘 마무리해가던 우리는 까미노의 대략 삼분의 일 지점인, 스페인의 유서 깊은 도시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했고 거기서 사달이 다. 머물던 알베르게에서 베드벅이 출현한 것이다.


 부르고스의 순례자용 숙소인 알베르게의 첫인상은 크다, 그리고 모던한걸,이었다. 오층으로 된 도심에 위치한 시립 알베르게였고 트렌드에 맞게 독립 공간이 확보되도록 레이아웃 된 방에 단단한 벙커 침대가 벽과 일체형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일행 중 칠십 대 초반의 남자 어르신과 이십 대의 군 복학생을 제외한 나를 포함한 네 명은 같은 방으로 배정을 받았다. 주방 사용이 불가능해 근처 식당에서 파스타로 저녁을 챙겨 먹고 8시가 안 돼 각자의 침대에서 우린 곯아떨어졌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 일행 중 한 명이고 유독 베드벅에 예민한 드라마 작가 입봉을 준비 중이던 삼십 대 중반의 여자가 갑자기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곧장 방의 전체 등이 켜지고 울 듯한 표정의 작가가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Bedbug! Everybody, check check bedbug!!'     


 붉은 핏자국과 뭉개진 베드벅의 사체가 묻은 흰 휴지를 들어 보이며 작가는 이 응급 상황을 이해하라는 듯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작가의 응급상황 전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일단 각자의 매트리스와 담요를 들춰 흔들어 보고 주변 벽을 한 번 쓱 눈으로 훑는 것은 비슷했지만 이후의 행동은 달랐다.

1. 일단 침대를 탈출하여 건물 내 대피소를 알아본다.(나를 포함한 한국인들)

2. 침대에 남지만 눕지는 못하고 취침 등을 켜놓고 앉아서 상황을 관망한다.

3. 전체 등과 침대 취침등을 끄고 누워 다시 잠을 청한다.


 불이 꺼지면 베드벅이 다시 활동하니 불을 켜고 있자는 방 안 누군가의 의견도 있었지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작가 외에 몇 명이 자기도 물린 것 같다는 말을 했지만 순례자들은 피곤했고 각자 알아서 이 상황에 대한 대처에 들어간 것 같았다. 동지애로 똘똘 뭉쳐 하나로 움직인 건 우리 한국인 일행, 베드벅버스터즈(bedbugbusters) 뿐이었다.

 칠십 대분은 괜찮다고 하셔서 다른 방에 있던 이십 대의 복학생을 데리고 우리 다섯 명은 짐을 모두 챙겨 일층 데스크로 내려갔다, 컴플레인을 위해. 하지만 당연히 밤중까지 자리를 지키는 직원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린 2층(어쩌면 3층) 한 구석 긴 테이블이 놓인 어둑한 휴게실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심각하게 작전회의에 돌입했다.


 다른 방으로도 베드벅이 출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작은 동요가 있었지만 정작 피난 나온 사람들은 우리뿐이었다. 걸으면서 친해진 몇몇 남미 친구들이 휴게실로 찾아왔지만 곧 다시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휴지에 압살 당한 베드벅 사진을 인터넷 카페에 올리던 작가는 간지럽기 시작한다며 울상을 지었고 나머지 동지(?)들도 찜찜한 맘에 배낭에서 옷가지를 꺼내 바닥에 풀어놓았다. 우린 일단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 중지(志)를 모으기 시작했다.

1. 이른 아침, 순례자들이 일어나고 데스크도 열리면 상황을 알리고 관리 부실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함께 환불을 요구한다.

2. 길에 나서기 전에 옷가지와 배낭에 신발까지 건조기로 살균 소독한다.

3. 약국에 들러 (효과는 별로 없겠지만) 약을 산다.


 4번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던 우리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듯한 육칠십 대 정도로 보이는 백인 남자 한 명이 복도를 지나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게 됐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한마디 아니 두 마디를 툭 던지고는 그는 사라져 갔다.


'Please, don't make a fuss. Bedbug is also part of Camino to pilgrims. '

'소란스럽게 굴지 마. 베드벅도 순례자들에겐 까미노의 일부니까.'



 

 우리는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작가는, 암세포도 생명이잖아, 이후 가장 공감 안 되는 망언이지 않냐며 그 노년의 순례자를 힐난했지만 난 대차게 한방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데 뭔가 대단히 심오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에 지쳤고, 사십 대가 두려웠다. 그래서 순례길을 선택했고 조용히 걸으면서 내 자신에게서든 타인에게서든, 아니면 길 위의 풍광에서라도 용기를 얻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난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경주마와 영웅담을 짓는 이야기꾼이 반반쯤 섞인 기이한 순례자가 되어 있었다. 특히 젊은 이십 대들과 두 번이나 순례길을 완주한 강건한 칠십 대가 있는 그룹 안에 속하면서 뒤처지지 않겠단 생각이 단단히 머릿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자랑할 만한 성과나 이야깃거리를 꼭 얻어가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도 꿈틀대고 있었으리라. 그래서인지 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짐도 부치지 않은 채 다채로운 모양의 순례자 여권 스탬프를 자랑스레 적립해 나갔. 거기에 사회에선 부딪힐 일도 흔치 않을 다양한 사람들과의 끈끈한 연대의 경험도 훈장마냥 좋았다.

 하지만 무리 안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걷다 보니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언젠가부터 다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비슷하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난 까미노로 흘러들어온 이유 따위는 까무룩 잊어버리고 길 위에서마저 두려움과 경쟁, 관계로 점철된 길 밖의 세상을 다시 짓고 있었다, 채 이주도 되지 않아서 말이다.


  일행 중 절반은 베드벅에 물렸고 절반은 괜찮았다. 난 괜찮지 않은 절반에 속해 부르고스를 떠난 이후 일주일 가까이 가려움과 진물에 고생했다. 연고를 바르고 방역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걷는 속도도 처졌다. 그리고 여섯 명은 두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쪼개졌다, 베드벅에서 자유로운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로. 나를 포함한 베드벅 그룹은 느리고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또 며칠 만에 난 베드벅 그룹에서마저 이탈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됐고 처음처럼 다시 혼자가 됐다. 삼십 일에 짜 맞춰 놓은 일정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돼 갔고 가려워 미치겠는 날은 짐도 포터 서비스로 미리 다음 알베르게로 보내기도 했다. 한 번 원칙과 속도에 집착하지 않게 되자 난 길 위의 풍광만큼 다채로운 순례자들과 문득 곁을 나누고 있었다.


 이혼 후 혼자 키워야 하는 어린 아들과 전 아내에 대한 분노를 함께 어깨에 올려놓고 산길을 타는 몸만 건장한 삼십 대 한국인 남자, 죽기 전에 유산을 당겨서 달라는 큰아들 놈의 진심 어린 부탁에 모든 게 허무해지고 우울해져 무작정 떠나왔다는 일산에 사는 대한민국 일 세대 바이크족 할아버지, 집 앞에서 순례길을 시작해 걸으며 힘들어지면 언제라도 다시 집 앞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던 이십 대의 독일인 남자, 침묵(silence)이 써진 자그마한 푯말을 목에 걸고 다니던 백인 여자 등이 궤도를 이탈한 나를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고난 속에서도 만남의 광장을 펼쳐 웃음과 재미를 기어코 발견하고야 마는 행복한 또 다른 여행객 그룹도 있었고 이십 일 컷을 목표로 올림픽 국대라도 되는 양 질주 본능을 시전하는 체대생 한국인도 시끌벅적 나를 스쳐 지나갔다.




 베드벅의 흔적을 지우며 다양한 사람들을 선으로 잇지 않고 하나의 점으로 찬찬히 들여다보며 느리게 난 계속 걸었다. 그리고, 걷다 보니 (예상보단 많이 늦어졌지만) 어느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는 사리아(Sarria)에 도착해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부르고스에서 결성됐다 며칠 만에 해체된 베드벅버스터즈 중 질주마를 담당하고 있던 이십 대 남녀 두 명과 조우했다. 예상보다 사오일 정도 뒤처진 내가 이을 만날 가능성은 당연히 없었는데 뜻밖에도 그들은 부상을 당해 고생하느라 여정이 늦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복학생 남자아이는 군대에서 흔히 걸리는 봉와직염으로 발 뒤꿈치가 퉁퉁 붓고 곪아 고생하고 있었고 여자아이도 넘어지면서 뾰족한 돌 모서리에 손바닥이 찢어지면서 치료를 받고 휴식을 취하느라 속도가 늦어진 상태였다. 우리 셋은 보자마자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마치 셋 다 부질없는 속도에 취해 질주하다 낙마한 부상병처럼 보였지만 결국 다시 만났고 이제야 진짜 뭔가 산티아고 순례길 위의 동행이 된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다음 날부터 우리 셋은 순례길의 마지막 며칠을 함께 했다. 이십 대 여자애와 나는 가능한 한 천천히 함께 걸었고 목발로 걸을 수밖에 없던 복학생은 차량으로 이동하며 지정된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함께 마무리했다.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날 밤에는 불 꺼진 알베르게의 주방 구석에서 환자인 그들은 음료수를, 나는 와인을 조용히 홀짝이며 고난으로 점철된 까미노 순례길을 회고하다 살짝 눈물 몇 방울도 함께 흘렸던 것 같다.

 

 뻔한 비유지만 까미노 순례길은 인생과 별반 다른 게 없지 싶다. 계획한다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다신 못 볼 것처럼 멀어졌다가도 이렇게 다시 만나기도 하니 말이다. 무엇을 품고 무엇은 피하겠다는 이 모든 생각들이 그저 생각일 뿐이라면 참 허무하다.  베드벅을 그렇게 두려워하며 난리법석을 떨던 우리에게 베드벅은 자비가 없었고,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길 위를 질주하던 이십 대들도 한순간의 실수로 손발이 찢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적어도 밀려오는 것들에 대한 태도와 자세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 않은가, 또한 반문해보고 싶다. 우리의 고난이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혹시 베드벅(bedbug)의 철자를 착각해서가 아닐까? 모두가 고난을 온몸으로 껴안는 종교적 순례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악을 악으로 실체화하는 건 우리의 태도와 판단이라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닥쳐온 상황에 대해 나를 지키는 것은 두려움으로 범벅이 된 어지러운 맘이 판단의 조타수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과 태도를 존중해 주는 것만 잊지 않기.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부르고스에서의 그 소동은 사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선을 넘은 것은 어느 쪽일까? 선의라 믿고 한밤중에 난리 부르스를 췄던 베드벅버스터즈 한국인들인지, 베드벅도 순례길의 일부일 뿐이라고 일침을 가하던 그 백인 할아버지인지 말이다. 모르겠고, 어느 쪽이든 상관 없이 길 위에 Bad Bug이란 없다는 것, 이건 확실하다. 그러니 다음 순례길 여정에선 힘 좀 빼고, 가드 내리고 맘 편하게 베드벅에 대처해도 될 것 같다. 아, 물론 그렇다고 또 물리고 싶단 소리는 절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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