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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Jun 06. 2022

우연한 영원 :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카메라를 든 거리의 유모,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벽지의 반복된 무늬 사이로 숨어든 못자국처럼, 일상의 가지런한 시간 사이를 불쑥 뒤틀며 찾아드는 낯선 들에 대한 로망이 있다. 예를 들면,


 좁고 느스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소외가 선사하는 주말 오후 텅 빈 잉여의 순간, 불현듯 길을 잃어버릴 때마다 차오르는 두려움과 아득함이 교차하는 순간, 모국어가 사라진 북적이는 카페에 우두커니 앉아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의미를 빚어내지 않는 말의 파편들이 평등하게 무의미해지는 순간.  


 의미와 말들이 분주하게 교차하는 거리의 뒤꼍에 오히려 늘 마음이 쓰였다. 아름다움은 전시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며 의미를 넘어선 진실은 사라져 가는 것들 속에 있다고도 믿었다. 그러나 상실되는 것들의 마지막 숨결, 두 번 오지 않고 사그라드는 단 한 번의 몸짓이 못내 아쉬워 그런 순간에 자꾸만 그리고 어느새 의미를 좇다 놓치다를 반복하며 사이사이 글을 썼다. 기억을 담고 의미를, 아름다움을 박제시키려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여행지에서라면 더더욱 난 그런 사람이었다. 텅 빈 충만을 다짐하지만 어느새 기록하고 찍고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록들 대부분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망각되고 때론 망실되어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의미를 상실하곤 했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그토록 원하던 로망이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완성되어 갔다. 변함없이 반복되는 방식이다. 내가 의미를 매달아 놓은 숱한 기호들은 애초에 세상에 나오길 주저했던 거칠고 부끄러운 자의식이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꽁꽁 숨겨 마치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고 싶었던 익숙한 얼굴, 묻고 싶었던 얼굴을 세상과 함께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낯선 환경 속 새로운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이고 생생한 물성에 대해 늘 예민한 촉각을 곤두 세우고 관찰하는 사람이 꼭 사교적인 건 아니다. 성긴 인간관계의 틀은 오히려 여분의 시간, 천천히 거리와 골목을 기웃거리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을 관찰하게 해 준다. 하지만 내가 그러하듯, 그리고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가 그러했듯, 내향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자신을 촘촘히 통과한 기록과 이야기들을 내보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왜곡하고 싶어지는 자신을 보는 일이 괴로워 층층이  다락방 구석 먼지 가득 방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Finding Vivian Maier)>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이름으로 수십만 장의 필름 사진을 남기고 죽은 여인에 대한 단순한 궁금증으로 시작한다.  

'왜 그녀는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고도 단 한 명의 타인에게도 그것들을 보여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을까?'

 영화는 그녀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억을 인터뷰하며 비비안 마이어라는 미스리 투성이인 한 인간의 총체에 다가서려 애쓴다. 그녀를 겪어본 다양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영어 단어로 그녀에 대한 단서를 던져준다.


 'paradoxical(역설적), bold(대담한), mysterious(신비한), eccentric(기이한), unusual(특이한), private(사적인), loner(외톨이), curiosity(호기심)......'


 

 그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저 단어들 대부분은 그녀가 찍은 수많은 사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하지만 단 하나, 그녀 또는 그녀의 삶에 쓰인 적이 없는 단 하나의 단어가 사진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조용히 발화된다, 'beautiful'이라고.  


 2007년 겨울, 시카고에 대한 역사책을 준비 중이던 영화의 감독 존 말루프(John Maloof)는 시카고의 과거를 보여 줄 사진 자료들이 필요했다. 그는 집 앞 경매장에서 비비안 마이어라는 철저한 무명의 한 사진작가의 이름으로 나온 대량의 필름과 현상된 사진을 380달러에 구매한다. 쓸모를 찾지 못해 이년 가까이 방치했던 사진들을 다시 꺼내 든 감독은 그녀의 사진 몇 장을 골라 스캔한 후 자신의 블로그에 구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업로드한다. 그리고 사진을 감상한 사람들로부터 폭발적인 찬사가 이어진다. 존 말루프는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 사진을 수소문해 추가로 구매하고 무명의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를 검색해 본다.

 그리고 며칠 전에 올라온 한 줄의 부고 기사를 인터넷에서 확인한다.


  Vivian Maier died peacefully.  

 감독은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유품을 가져오고 그녀가 유모 일을 하며 홀로 살아왔단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미스터리한 여인의 삶을 추적하고 그녀의 사진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그 첫 프로젝트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손수 인화하고 프린트해 시카고 문화센터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 결과는 대성공. 전시회장으로 연일 구름떼 같은 관객들이 찾아와 그녀의 사진을 감상하고 감동한다. 그리고 언론 매체는 호들갑스럽게 미스터리 한 한 무명 사진작가가 불러일으킨 센세이션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비비안 마이어를 유모로 고용했던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정부 문서 보관소에서 그녀의 출생과 가족에 대한 단서를 찾아가며 영화는 조금씩 그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드러낸다.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난 비비안 마이어는 어린 시절 프랑스 출신인 홀어머니 아래서 자란다. 유년기엔 잠깐 프랑스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지만 성인이 된 후 가족들과 헤어져 이후 어떤 교류도 없이 살게 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철저히 1인분의 삶만을  것이다. 뉴욕에서 봉제 공장 노동자로 잠깐지만 좀 더 개인적 자유가 확보되고 바깥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을 원했던 비비안은 유모 일을 50년대부터 시작해 평생의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유모 일을 하며 틈틈이 그녀는 목에 카메라를 걸고 시카고의 곳곳을 배회하며 인물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예쁘고 화려한 사진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표정과 몸짓이 담긴 사진이 대부분이다. 그녀는 계급과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한번 지나쳐 가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찰나의 고유한 질감을, 그 단면을 사진에 담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을 구석진 거리의 낯익은 낯섦,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프레임에 담아내는 사진작가로서 그녀가 가진 깊이와 통찰력은 평론가들조차 감탄케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질문.  


 '도대체 그녀는 왜 그토록 방대한 양의 사진을 찍고도 홀로 간직했을 뿐, 생의 비애와 고단함, 환희와 따듯함이 가득 교차하는 아름다운 사진들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걸까?'


 영화의 대부분은 비비안 마이어를 유모로 고용했거나 그녀가 돌본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다. 그녀가 병적으로 물건을 모았고 자신의 공간을 외부에 노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으며 매우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에서는 모두 공통된 의견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람들의 진술은 조금씩 결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난폭하고 아이들을 학대했던 여자로, 또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을 무척이나 아끼고 직업적 자부심이 가득했던 프로페셔널한 유모로 기억한다. 자신의 이름을 다양하게 변주하며 언어적 유희를 즐긴 괴짜로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녀와 비교적 가깝게 지냈다고 고백한 인터뷰이(interviewee)는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갈망했던 평범한 여자로 비비안 마이어를 묘사하기도 한다.   


 그녀는 사진뿐 아니라 인터뷰 등을 통해 하층민들의 삶과 정치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담은 영상 필름도 남다. 이는 세상을 혼자 떠도는 섬으로 살았으리란 감독의 예상을 비껴간 것이었고 관객들로 하여금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물에 대한 더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유모의 일을 잠시 중단하며 세계 각지를 여행했던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마을 주민들과 자연 풍경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는 지속해 왔던 질문, 왜 자신의 작품을 꼭꼭 숨겨 놓았을까라는 질문에서 과격하게 방향을 튼다. 비록 실제로 부쳐지지 못한 편지였지만 비비안은 머물렀던 프랑스 마을의 사진관 주인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인쇄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좋은 사진들이 굉장히 많아요... 무광택으로 인쇄를 부탁해요...'

비비안 마이어는 결코 자신이 찍은 작품의 가치를 애써 외면하거나 보여지는 걸 두려워한 사람이 아니었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단지 그녀는 주저했으며 자신의 욕망을 거칠게 밀어붙일 만큼의 집착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 후반부로 들어서면 촘촘히 쌓아 올린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간에 대한 서사의 조각들, 이 모든 추측과 판단이 의미의 영역을 넘어서 어떤 진실의 순간과 맞닿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순간이었을지언정 비비안 마이어가 세상을 향해 유일하게 소통에 대한 욕망을 내비친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 보네 앙 샹소르에서 오십 년 전 그곳 사람들과 풍경을 찍은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감독은 개최한다. 마을 사람들은 반세기 전 우연히 그녀의 프레임에 들어왔다 사라져 간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남은 사람들의 흔적을 비비안 마이어의 흑백 사진 속에서 되짚 웃고 울며 영원의 순간을 함께한다.  

 세상의 난폭함과 불편함을 폭력적으로 아이들에게 알려준 괴짜 유모, 물건을 버리지 못해 다락방의 바닥이 휘도록 쌓아두는 저장강박증 환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다정한 친구를 갈구하던 외로운 어른...... 이 모든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영화 속 단서는 그녀에 대한 부분의 진실일 뿐일 것이다. 부분의 진실들은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한 인간의 총체를 온전히 보여주는 것에는 끝내 실패하게 된다. 부분의 진실에는 어쩔 수 없이 바라보는 이들의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함이란 것이 혹시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간에 꿰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그을 넘어 전해지는 생의 단면, 순간에 담긴 찰나의 진실을 함께 바라보공감하는 진심에 있지 않을까 싶다. 


 지속되지 않는 순간의 진실을 포착하며 거리를 떠돌았던 비비안 마이어.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나 의미의 축조보다 스쳐 지나가는 우연과 그것이 가닿을 영원의 길을 걸어 뚜벅뚜벅 우리에게로 그렇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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