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오카 이치타케(片岡一竹)라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을 연구하는 일본의 젊은 정신분석가는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모든 사람은 신경증자, 정신병자, 도착자, 자폐증자 중에서 어느 하나로 분류되며,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달 전쯤 거의 십 년 만에 후배 한 명이 포함된 대학 과 동기 모임에 참석했다. 그동안 모임에 발을 끊은 이유는 학원강사로서 주말에 주로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거기다 다들 결혼하고 애까지 있는 친구들 틈에서 미혼인 내가 맞장구치며 할 얘기가 별로 없단 것도 발길을 주저하게 한 또 다른 이유였다. 요샌 주로 과외를 해서 시간이 나기도 했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친구 녀석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모임에 오랜만에 참석하게 됐다. 나 포함 다섯 명의 오십 전후의 아저씨들이 종로의 한 호프집에 모였다.
십 년만큼 주름과 뱃살, 그리고 하고 싶은 말들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 있었다. 우리들은 최근 당선된 대통령 얘기부터 주식, 코인, 부동산 그리고 자식들 얘기까지 뻔한 레퍼토리를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술자리는 이차, 삼차로 이어졌고, 마.침.내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가 관통하고 있는 단단한 삶의 진짜 '통증'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다들 무난하게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았지만, 속사정은 그렇지도 않았다. 모두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앓고 있었던 것이다.
맨몸으로 위험천만한 암벽을 오르는 알피니스트(alpinist)처럼 위태위태한 삶을 살다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친구도 있었고, 코로나로 인한 위기를 힘겹게 온 몸으로 버티며 사업을 꾸려가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우린 남자 어른이라고 불리니까. 그런데 모임의 유일한 후배 녀석, 나처럼 통 행방이 묘연해 다들 궁금해하던 술 취한 후배의 눈물 댐이 왈칵 무너져버렸다.
울어버린 어른 남자의 아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마흔이 넘어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고 좋아했던 후배의 아들이 자폐를 앓고 있단 얘긴 다들 처음 듣는 눈치였다. 다행히 중증도의 장애는 아니며 지속적인 치료와 후배 부부의 간절함 덕분으로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후배는 울었다. 장애를 가진 아빠이기에 더 단단해지고 강해져야 한다고 말해주려다 입을 닫았다. 이미 그 말은 다른 동기 한 명이 해주고 있기도 했고, 그냥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삶을 연민하며, 애처로워하며 울게 두고 싶었다. 울다 중간중간 후배는 한탄처럼, 넋두리처럼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아이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런 모습을 내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요......"
시간은 새벽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곧 날이 새고 다시 돌아가 아이와 함께 후배가 헤쳐 나가야 할 세상, 크고 작은 뾰족한 가시로 울타리 쳐진 세상을 생각하니 더욱더 울게 두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은 용기니 책임감이니 그런 거 말고 남자 어른도, 아빠도,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어도 애처럼 엉엉 울 수 있다고 조용히 그의 울음을 들어주며 위로해 주고 싶었다. 후배의 눈물을 보며 그가 그토록 바라는 아이를 위한 '정상'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아득한 질문이 속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다. 울던 후배를 마주하기 전에 이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드라마엔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이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한 이십 대의 여자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있듯 주인공이 자폐에 대한 주변의 편견과 싸워나가면서 변호사로서 인정받고 세상과 소통해 나가는 이야기가 매회 새로운 사건과 함께 펼쳐진다. 특히,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 우영우가 같은 장애를 가진 피고인을 변론하는 내용의 세 번째 에피소드가 개인적으로 꽤 흥미로웠다. 아래는 해당 에피소드의 초반에 나오는 사건을 설명하는 선임 변호사와 우영우의 대화다.
선임 변호사 : ......피고인한테 자폐가 있거든......
우영우 : 제가 자폐인이라서 이 사건에 배당하시는 겁니까? ......자폐의 공식적인 진단명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입니다. 스펙트럼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자폐인은 천차만별입니다......
선임 변호사 :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우영우 : ......(피고인) 김정훈씨는 정신 연령이 6세에서 10세 정도인 중증도의 자폐인인데 저는 이런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자폐인도 천차만별이란 드라마 속 우영우의 말이 얼마나 당연한가는 '정상성'이라는 판타지 뒤에 숨어 있는 우리의 사고능력을 잠시 꺼내오면 금방 드러난다. 자폐 증상은 대부분 유전적 요인에 의해 발현되며, 유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특성은 사교성의 정도, 감수성의 차이, 쌍꺼풀의 유무, 다양한 피부색 등과 같이 숱하게 많다. 이런 발현된 유전적 형질 하나가 그 사람의 총체를 설명하는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아주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화는 자폐를 숱한 비정상의 하나로 단순화시키도록 우리들을 유도하며 유아기적 사고에 머물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든 아니면 우리가 가진 유무형의 소유물이든 그것들이 분명하고 명확한 어떤 범주에 속하고 분류되는 것을 대체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정상과 비정상에서 출발해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진보와 보수, 새것과 낡은 것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이런 이분법은 결국 다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거대한 범주 안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꼭 이런 이분법이 아니더라도 결국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범주(화)에 완벽히 순응하며 혹은 그런 척 살아간다. 아니, 정상인 척 살아간다. 정상의 범주에 속해 있음에, 그런 척할 수 있음에 안도하며 매일매일을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정상성'은 왜 그토록 우리들의 힘센 욕망이 되었으며 굳건하게 우리를 그 속으로 몰아가는 걸까.
정상성은 다수에 기반하며 그 다수의 무리 속에서 우리는 무형의 권력을 창출한다. 그리고 그 권력은 소수자들에게 비정상이란 낙인을 찍으며 행사된다. 때때로 위험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정상의 영역에 속한 다수의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낀다, 결국 착각이긴 하지만. 반면 비정상이라고 낙인찍힌 소수자들은 더 이상 자세히 들여다봐지지 않는다. 자폐도 대안 가족도 특이 성 정체성도 그저 하나의 거대한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권력이 폭력이 될 때 그 폭력은 소수자에게만 향하진 않는다. 정상성의 범주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사고를 단순화와 일반화를 통해 마비시켜버리는 또 다른 폭력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정상성이 단지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꼭 알려져야 할 절실한 진실이 되는 이유이다.
살면서 누구나 정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들에 한 번쯤은 마주한다. 범주를 비껴간, 굵직한 선과 선이 매끈하게 맞닿지 않는 미세한 사이의 존재나 경계가 뭉개지고 겹쳐지는 지점을. 그리고 그 순간 우린 인식의 확장이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보단 대부분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건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일 뿐, 일반적이고 단단한 범주의 프레임을 와해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정답이 없는 질문은 질문의 가치가 없다고. 내가 발 딛고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붕괴는 가능성만으로도 그만큼 힘들고 두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뻔한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의 가면을 한 꺼풀만 벗기고 '나들'을 들여다보자. 우리들의 정체성은 몇 가지 MBTI 성격유형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어찌나 그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한지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서로 겹치지 않으며 범주화될 수도 없다.
다만, 80억 명의 다양한 그 누군가의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신경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모습으로 아프지도 않으며 아프다고 모두 건강이라는 '이상'을 향해 병원 앞에 줄 서 있을 필요도 없다. 앞서 말했던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의 작가는 책 속에서 정신분석의 다양한 개념을 통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한 때 가지고 있었다고 믿는 어떤 정상성을 되찾고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일이라고. 그리고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잃어버리거나 도달해야 할 '정상성'이라기 보단, 끊임없이 미끄러지더라도 사회가 정해 놓은 것이 아닌 각자의 윤리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윤리란 자신이 자신다울 수 있는 가치로 인해 아프고 고통받고 있단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결국 우리 모두는 다 자신의 방식으로 아픈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라면 분명 정상과 비정상의 분별은 힘을 잃고 경계는 좀 더 흐릿해질 것이다.
책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얘기를 하며 오늘의 장광설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자폐인의 살인 사건을 수임받은 주인공 우영우는 중증도 자폐인인 피고를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묻는다, 자폐인과 어떻게 하면 대화를 잘 나눌 수 있는지.
아버지 : ......역시, 자폐인과 사는 건 꽤
우영우 : 꽤?
아버지 : 외롭습니다. 아빠 생각에는 이 세상에 너랑 나랑 둘뿐인 거 같은데, 딸인 너는 아빠한테 전혀 관심이 없거든.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땐 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속 우영우의 아버지가 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단 건 쉽게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딸과의 소통 방식이 소위 말하는 다수의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외롭다는 걸 아프지만 인정한다. 하지만 다르다고 자식에게 정상의 언어를 강요하거나 가르치기보다 다른 그 모습 그대로 우영우가 자신의 삶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바라봐준다. 사랑에 대한 한 가지 정의를 드라마 속 우영우의 아버지의 태도를 통해 다시 배워가는 기분이다.
사랑이란 상대방이 타고난 자신의 무늬를 낙인이 아니라 고유한 개성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흐트러짐 없는 따뜻한 시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