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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병권 Aug 30. 2017

아주 오래 전, KIST~

내 평생 잊지 못할 일 (한국일보)

<내 평생 잊지 못할 일, 주병권>  

KIST 후문의 추억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는 홍릉에 있다. 그러나 KIST의 후문은 성북구 월곡동, 지하철 6호선 상월곡역 부근에 있다. 지인들이 내게 KIST가 어디에 있는지 물으면, 나는 월곡동이라고 답하는 것이 편안하다. 홍릉에 있는 KIST의 정문이 깊게 미지의 장소로 들어가는 듯한 엄숙한 느낌을 준다면, 월곡동 후문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풍경은 비교적 넓고, 정겹다. 풀밭, 놀이터, 키 작은 농구대, 테니스 장, 작은 아파트, 그리고 강아지 한 두 마리가 뛰어 놀던 수 년 전까지는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내게는 지난 30여년간 그립고, 아름답고, 오래 기억될 일들이 함께 한 장소이기도 하다. 평생 잊지 못할 일들까지도…    


30여년 전, 수 십 가구가 등잔불 아래에 모여 살던 충북 제천의 작은 산골에서 단지 지능 지수가 높게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내 아버지가 데려다 놓고 내려가신 자리도 후문 건너편 산 아래 마을이었다. 월곡초등교 시절, 호기심으로 후문 밖에서 기웃거리면, 진달래 꽃, 철쭉 꽃 한 아름과 뛰어 놀고픈 공터, 그리고 작은 동산들이 눈에 들어 왔다. 가끔은 동무들과 몰래 들어 갔다 들켜서, 경비 아저씨들의 꿀밤 맞이가 되기도 하고… “또 들어오면 안돼” 하고 보내면서도 한 아름 안고 있던 진달래꽃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주시던 마음이 고마웠다. 중학 시절에는 단체 견학을 왔다가, 성체 같은 본관 건물에 놀라기도 하고, 대학원 과정에서는 논문을 찾기 위해 버스를 타고, 후문에서 내려 원내 도서관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1987년 겨울, KIST 연구원으로서 첫 출근을 시작한 날, 연구실에서 입사 동기인 그녀를 만났고, 단지 며칠 늦게 출근하였다는 이유만으로, 4167과 4169, 오차 범위 내에 드는 사번 차이로 인해 선배 대접을 하여야 했다. KIST의 역사와 건축물이 뿜어 내는 고고함과 기라성 같은 선배 연구원들의 연구 분위기에 압도 당하여, 늘 두개의 수레 바퀴처럼 의지하고 다녔다. 연구실에서 실험실로, 자료실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다가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각 모양의 호반, 목련과 벚꽃이 어우러진 그늘 아래서 산책을 했고, 어스름한 저녁에 연구실 문을 나서며, 은행 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따라 후문까지 함께 걸었다. 내가 집이 가까운 터라, 후문 버스정류장에서 161번 버스를 타는 그녀를 배웅했고, 그 덕에 가끔은 생맥주와 통닭을 대접 받기도 했다.     


우리는 2년쯤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에 결혼을 하고, 후문과 인접해 있는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기억 나는 일 중의 하나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후문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를 향해 원격 시동을 거는 작업이었다. 정조준하여 서너 차례 시도를 한 후 시동이 걸렸음을 알리는 불빛이 깜빡이면, 그 날 따라 기쁨이 컸다. 집에서 후문까지는 걸어서, 후문에서 연구실까지는 차를 이용하여 출근하는 다소 비 효율적인 생활이 운용된 적도 있었다. 다섯 살 바기 딸아이는 후문을 들어서면 마련되어 있는 풀밭 위의 작은 놀이터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휴일이면, 시소와 그네를 밀고, 작은 공을 던져주며 어울리곤 했다. 가끔은 은빛 자전거의 앞 자리에 태우고 후문 도로를 통해 동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지나 다시 후문으로 내려오는 비탈길을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곤 했다. 그 시절, 자전거 바퀴에서 부서지는 벚꽃 이파리들이 페달을 밟던 다리에 닿는 느낌이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새롭다.  

  

내게 일과 사랑이 공존하던 곳, 어린 시절의 추억과, 젊은 날의 패기, 사랑과 우정의 감동, 지금은 중년의 고독이 머무는 곳, KIST의 후문과 이를 통하여 이어지는 가로수 길은 정겹다. 오늘도 은행 나무 길을 걷는다. 제법 나이가 들어 고고함 마저 느껴지는 은행 나무들, 추억처럼 걸터앉아있는 이파리들이 초록에서 갈색으로 바뀌고, 하염없이 길 위로 낙하하고, 그 위를 흰 눈이 덮고, 잎이 떠난 나뭇가지에서 다시 싹이 돋아 오르는 계절의 변화를 응시하면서, 내가 걸어 온 길과 가야 할 길이 어디쯤 있는가도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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