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이사하고 조용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시 한복판인데도 불구하고 비추는 볕이 좋고, 주변 동네 분들이 자기 주택 조경에 힘을 쓰다 보니 계절마다 피는 꽃이 다르고 열리는 열매를 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여름이라 옆 주택 건물 돌담엔 햇빛을 붉게 머금은 능소화가 가득 피었다. 어느덧 창문 앞 테이블에 앉아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좋아하는 차를 마시고 글공부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나는 이 일상을 꽤 좋아한다.
내가 작업하며 바라보는 창에는 작지만, 튼튼한 선반이 밖으로 달려 있는데 가끔 바라보고 있으면 내려앉은 새들이 창틀에서 쉬다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하루는 까투리가, 하루는 참새 부부가 짹짹 인사하고 푸드덕 날아간다.
얼마 전 저녁, 한강으로 자전거를 타러 갔다가 물 마시러 간 식수대에 고인 물을 마시는 귀여운 제비를 봤다. 그런데 저 멀리서 한 부자지간이 다가오더니 그 물에 비누를 묻힌 채 손을 씻고는 사라졌다. '여기 식수대인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진 뒤였다. 고인 물은 이제 새가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었다. 근처 나뭇가지 끝에 앉아 이 광경을 보던 다른 색 제비도 건조하게 쏘아보다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다음날 또다시 일상. 식탁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창틀엔 어김없이 새가 와서 날 보고 울었다. 문득 어제 한강에 비눗물이 된 고인 물이 생각났다. 비 오는 날이 아니면 새들이 도시에서 물을 먹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겨우 찾은 샘물도 사람 욕심에 쉽게 오염되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적당한 크기의 물그릇과 앉아서 마실 수 있는 돌덩이를 하나 구해 창틀 선반에 올려놨다. 이제 우리 집에 잠시 쉬어가는 새들이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참새가 물을 마시고 가더니, 얼마 전에는 큰 까마귀 한 마리가 물을 마시러 오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깍-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맙다 인사를 하는 건가!
어릴 적에 가족들과 산속 계곡에 놀러 갔다가 먹던 쑥 지짐을 잘게 찢어 '고시레'라 외치며 숲 속에 던지던 일을 떠올렸다. 주변에 있을 작은 신들에게 공양을 바치는 재미있는 전래 풍습.
사람이 아니고, 이 세계 것이 아니어도 모두가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 즉 살아남는 일은 모두 똑같을 테니.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 도시인 이 서울에서도, 작게나마 자연이 찾아와 인사하는 일에는 어쩐지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이처럼 다른 것을 보살피는 일은 사실, 나 자신을 보살피는 일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새들이 물 마시는 거를 보려고 냉큼 테이블에 앉아 책 한 장을 더 넘기고, 글 한 줄을 더 쓰기도 했다. 옆 건물 돌담에 핀 능소화를 기르는 할머니도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보살피는 여생을 보내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 자신을 보살피는 일은 다른 것을 아름답게 하는 일과 마찬가지겠다. 살아내는 일이 쉽지 않아 그만큼 생존 불안이 커진 박약한 세상이지만, 끝내 내가 보살피는 것들이 결국 나를 살펴봐 주더라.
얼마 전 친구 생일을 착각하고 한 달이나 미리 전화해 축하했다. 친구는 나보고 매번 까먹는다고 나무라기도 했지만, 내 철딱서니 없음에 오히려 오랜만에 안부를 전할 수 있어 고맙다고 하며 웃었다.
어쩌면 우리, 아무리 작고 사소한 배려와 관심이어도 먼저 베푸는 게 좋겠다. 실수여도 웃어넘기면 그만이니, 주변 사람들에게 안녕을 기원하며 살뜰히 보살피자. 나도 사는 게 불안하고 어려운 만큼, 다른 이들도 불안하고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작고 여린 새가 이 내리쬐는 무더위에도 짧게나마 목을 축이듯이. 작은 보살핌은 되려 내게 충만한 사랑으로 돌아온다.
_이로 글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