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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 Oct 07. 2024

[서평] 최선의 삶 - 임솔아


 지독한 이야기다. 작가 임솔아의 <최선의 삶>은 중학생 여자아이들의 비행에 관한 아주 내밀한 이야기다. 처음엔 가벼운 ‘일탈’ 제안에서 시작했지만, 아이들의 비행은 하나의 뿌리에서 각자의 줄기를 타고 피어나는 꽃처럼 그 모양새가 아주 달랐다. 가출을 제안한 소영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최악의 수단이었지만, 화자인 강이(나)와 친구 아람에겐 ‘최선의 삶’이었다. 함부로 나간 집 밖에서의 삶은 ‘병신’같은 삶이었고, 그것은 학교에서 전민동 출신이 아닌 읍내동을 사는 ‘병신’이었던 ‘나(강이)’의 삶과는 또 다른 것이므로, 친구들과 강이는 여기저기 떠돌며 서로를 돌아갈 집으로 삼아 비행하는 삶을 이어간다.

나는 대학생 시절 한 번은 방학 때, 책의 주인공 강이 처럼 집 근처 횟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중학교 동창을 우연히 손님으로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알아봤으나 일찍이 화려한 옷을 입고 같이 온 남자 손님에게 몸매를 뽐내던 그 아이와 펑퍼짐하고 추레한 유니폼을 입고 일하던 나는, 서로를 모르는 체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 그 아이는 곧장 결혼했다고 소문이 들렸다. 그때 내 나이가 21살이었다.

그다음 방학 때도, 나는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 새로 온 미성년자 아이를 만났다. 책에 나오는 강이네 아이들과 또래 아이였는데, 가정폭력에 시달려 스스로 보육에 들어갔다고 했다. 미성년자가 내가 일하던 카페에서 일하려면 부모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의 사정상 서류를 준비할 수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아이 수습 기간 동안 일이 끝나고 군것질거리를 사서 주변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게 좋았는지 아이는 금방 나를 ‘인생 선배’를 만났다고 따랐다. 아쉽게도 난 부담스러웠다. 나는 그리 훌륭하지도, 여유롭지 못한 가난한 대학생이었으니까.



우리가 비행을 일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머무는 곳이 싫어서? 아니다. 어디든 그곳보단 나아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 이어서다. 갓 어른이 된 대학생 때, 나는 이 이야기 속 방황하는 아이들과 내 삶이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는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고,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그리 비참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성인이 되고 나서 이제는 정말 내 뜻대로 살고 싶고, 자유롭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그사이에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도 없진 않았다.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내 삶 하나 건사하기에 바쁘다. 내 방황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방황하지 않는 영혼이 있기나 할까. 인생의 크고 작은 선택 앞에 우리는 언제나 방황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비행만 일삼으며 살아가는 지도. 이쯤 되면 무엇이 비행이 아닌지 분간할 필요가 있나 싶다.
어른이 될수록 답은 더 정해진 게 없이 질문지는 더 어렵기만 하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과 내가, 구체적인 상황과 환경이 다를 뿐 방황하는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책에 등장하는 강이와 아이들과 내가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스스로를 믿었다. 어디서나 기죽지 않았다. 당장은 누추해도 항상 떳떳했다. 내 젊음은 그리해도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나는 여전히 방황 중이지만 내 삶을 사랑한다. 영원히 비행할 운명이라 해도 그 활주로는 내 마음과 신념에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나는 행복한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알 수 있다. 이 책을 펴낸 작가도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책 마지막쯤 강이가 소영을 찾아가 ‘해야 할 일’을 한 후에, 내리는 싸라기눈을 맞으며 헛헛해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그래. 누가 너를 용서할 수 있겠어. 또 누가 당신만을 탓할 수 있겠어. ‘삶은 원래 지독한 거야.’라고. 소설 속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부모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강이의 특유의 시선이었다. 소영으로부터 뒤틀린 삶 때문에 한 번은 무릎을 꿇고 부모에게 ‘도와달라’하는 것 이외엔, 어떤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작품에 아예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른들의 무기력한 비정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었다. 따르고 보호받을 대상이 없는 방황 하고 건조한 청춘 앞에 놓인 것은 여전히 먹고 살 잔인한 현실이다. 그래도 우리는 답답한 현실 속, 그 사이에 낀 먼지 같은 신념과 작은 친절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게 최선일 때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래. 누가 강이 너만을 탓할 수 있겠어. 그런 건 비겁한 거야.
그녀를 위로하며.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

bkksg.com

bkksg.studio@gmail.com


_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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