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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몽블 Apr 08. 2016

엄마, 나 회사 관둘까?

1992.4.8. 목요일. 비 옴

1990년도 엄마의 일기에 2016년도 제 일기를 더한 글입니다. 엄마의 하루와 제 오늘이 담겼습니다. 


1992년 4월 8일 목요일 비 오는 날 엄마가 쓴 일기입니다.  
: 이름 - 이슬
: 선영 - 슬이의 친구


아침부터 날씨가 쌀쌀하고 흐리더니 드디어 비가 내린다.


엄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빤 슬이를 보행기에 짚고 서게 하며 아빠가 천천히 밀면서 한 발 한 발 발 띄는 연습을 시켰단다. 덕분인지 오후에 선영이가 놀러 왔었는데 엄마가 슬이 손을 잡아준 오른발을 냉큼 들었다가 놓는다. 왼쪽 발은 아직 힘든지 띄지를 못하는구나.


슬이는 앉아있고 슬이 앞에 과자봉지를 놓아주니 그것을 잡으려고 한 손을 땅에 집고 또 다른 손은 앞으로 내밀며 번갈아 몇 번을 해보았지만 턱없이 손이 닿지 않자 포기를 하고 다른 것을 만지며 논다.


너무 힘이 들었는지 아랫도리를 다 벗겨 놓았는데도 머리가 땀에 촉촉이 젖었단다. 오늘 아침 슬인 6시에 일어났다. 엄마가 잠결에 '바스락'소리를 듣고 눈을 뜨니 슬인 머리가 요 밑으로 내려가 있고 파우더 통은 이미 엎질러져 있고, 엄마 머리핀을 잡으려고 두 손을 뻗고 있었다. 슬인 아직 기어 다니지는 못하고, 배로 밀고 뱅뱅 돌면서 이곳저곳을 두루 다닌다.


선영인 무엇이 즐거운지 슬이를 보더니 자꾸 '깔깔' 거리며 웃었다. 저녁때 엄마가 슬이에게 초콜릿을 주었다. 슬인 입속에서 오물오물 거리면서 맛있게 먹었다.



2016년 4월 8일 금요일 날씨는 맑은데 아직은 추움


엄마, 나 회사 관둘까?

처음엔 계속해서 좋은 직장, 이름 있는 직업, 복지가 좋고, 어디 가서도 떵떵거리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 서울에 혼자 떨어져서 생계만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을 받아가면서 정직원이 될지 안 될지 고민하면서 이 일을 하는 게 맞는지 매일 생각해. 보통 회사 들어가면 인턴부터 시작해서 통과하면 계약직이고 또 언제 계약이 연장될지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정규직이 되기를 기다리잖아. 그렇게 정규직이 되면 다행인데, 잘리면 또 다른 일을 구해야 하고, 그 또 다른 일은 또 계약직이고.


엄마 그거 알아? 내가 어디서 본 건데 '인턴'이라는 뜻이 '인'간을 '턴'다는 뜻 이래. 웃기지? 요즘 내 친구들은 인턴 하고, 또 다른 인턴을 하고, 또 인턴을 하더라고. 그걸 '메뚜기 인턴'이라고 한데. 요즘 참 재미있는 말들이 많은 것 같아.


어제 아침에 텔레비전에서 '바다로 돌아간 청년들'이라는 내용이 나오더라고. 25살 청년이 가업을 이어받아서 전복을 양식하는 일을 하고 있더라. 그 25살 친구가 그러더라?


"언제 잘릴지 모르는 일보다는 70-80년 기술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고"


그 말을 듣는데 나 울컥-했어. 도시에서 지방대 출신인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회사도 마땅하지 않고, 월세에 학자금 대출에 생활비에.... 나도 집에 내려가면 월급을 조금만 받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혼자 나와 사니까 집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더라. 나, 이 작은 지하방에서 울면서 고민했어. 집으로 내려갈까? 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잘 모르겠고, 내 미래가 암울한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 엄마.


계속 돈만 쫒아가다 보니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옮겼어. 경력도 얼마 없고, 나이도 애매하다 보니까 월급이 더 적어졌어. 그래서 돈 좀 아껴보겠다고 요즘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녀. 아침에 너무 피곤해서 간신히 엄마가 준 김치랑 김만 싸서 출발하지만 그래도 뭐 일은 재미있어! 다행히도.


아직 수습기간이라 월급에 80%밖에 받지 못하는데, 이번 달은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도 여기는 작은 회사라 수습만 잘 끝나면 바로 정직원이래. (좋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엄마, 월급이 170인 사람이 서울에 집을 사려면 137년이 걸린데.... 


나 어릴 때 걷기 위해서 한 발 한 발 노력했던 것처럼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더 나은 미래가 있을까? 오늘이 내가 처음 초콜릿을 먹은 날이라고 그랬잖아. 오물오물거리면서 맛있게 초콜릿 먹었다고. 어릴 적 처음 맛본 초콜릿 맛처럼 그런 달달한 앞날이 올까?


그래도 나 엄마 딸이니까. 뭐든 열심히 해볼게.

언제나 내편인 엄마! 오늘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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