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내민해 작가님의 추천으로 남형석 님의 <고작 이 정도의 어른>을 빌렸다. 하지만, 읽다가 부끄러운 마음에 덮어버렸다. 그와 나는 성별도, 직업도, 나이도, 성격도 다른데 그의 고백에 흡사 나의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이 정도까지 내려놓을 용기는 없는데, 이렇게나 요모조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떳떳하게 글로 드러낸 그에게 경외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끝내지 못한 나는 완독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말았다.
읽기를 포기한 대목은 그가 사람들의 말을 자주 끊고 말했다는 부분이었다. 급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말을 숱하게 꺼냈음을 고백하면서, 하루에 말을 몇 번 끊었는지 세어보았다고 했다. 읽은 지 꽤 시간이 흘러 구체적인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잦았다.
실은 나도 상대의 말을 끊고 내 이야기를 한 적이 많았다. 과연 몇 번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남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가끔은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상대의 말이 지겨워 맺음말을 듣지 않고 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며 말하겠다는 나의 신념과 배치되는 행태가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는데,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게 맞은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말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이나 수줍음과는 거리가 멀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약간의 긴장과 함께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려 낯빛이 하얘지기보다는 즐긴다. 하지만, 순간의 분위기에 취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내 자책할 때면, 말하는 내가 싫어졌다. 그런데 이 책을 들으며 듣는 모습까지 부족하다는 걸 자각하게 된 것이다.
말하는 것도 좋지만, 듣는 데도 진심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의 기저엔 읽고 쓰는 내가 있다. 삶에 대한 메시지를 읽고, 나의 감상을 적고, 새로운 생각을 쓴다. 말하는 나보다 한결 차분해진 상태로 읽고 쓰다 보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정갈해진다. 좀 더 듣겠다고 다짐하고, 말 하나에도 신중해진다.
좀 더 잘 듣기 위해서는 읽고 써야 한다. <고작 이 정도의 어른>처럼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의 글을 읽으며 반성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쓰는 나는 말하는 나보다 좀 더 자유롭고 솔직하다. 말하는 순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마주할 풍파로부터 은신해 글로 마음껏 분출하고 나서야, 좀 더 귀를 열 준비를 한다. 입으로 전할 말의 무게는 덜어내고,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