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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오름 Jan 29. 2024

의문을 제기하고 설명을 구하는 자세로

[다음 소희]를 보고

작년 3월 무렵, 주말에 대학원 수업을 듣는 생활은 그만하고 싶었다. 코로나19가 자취를 점점 낮추고 나니 비대면 수업은 사라지는 추세였지만, 매주 수업을 들을 자신은 없었다. 대면-비대면이 혼합된 수업을 찾다가, 금요일 저녁 강의를 발견했다. 불금을 뜨겁게 즐기던 건 몇 년 전의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렸고, 금요일이면 야근 대신 주말 출근을 택할 자유가 주어지는 유일한 평일이니 이 정도면 최적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수업내용은 제대로 모르고서.


<인권법연구 - 소수자의 권리>,

변호사인 시각장애인, 로스쿨생인 게이,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주도하는 장애인권단체 사무국장처럼, 그동안 주위엔 있는지도 몰랐던 다채로운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렬로 자리한 책상 대신 둥그런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기소개를 듣던 중, 한 유학생의 발표가 기억난다.  


“영화 <다음 소희> 꼭 보세요. 전주에서 콜센터로 취업한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이 자살한 사건을 다룬 영화예요.”


유학생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유창한 발음에 놀라다가, 내 고향 전주에서 고등학생이 죽었다니 한 번 더 놀랬다. 휴대폰 메모장에 <다음 소희>를 꾹꾹 메모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월 27일 밤, 소희를 만났다. 아마 남편이 장염으로 앓지 않았다면, 그래서 토요일 저녁 여느 때처럼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현장실습생의 고통을, 콜센터 직원의 애환을.


<다음 소희>의 주인공 소희는 춤을 잘 추고 좋아하는 여고생이다. 술자리에서 친구를 비난하는 남자에게 당차게 항의하는 당당함도 갖추고 있다. 고등학교 애완동물관리과에서 수업을 듣던 중, 학교 선생님은 대기업에 취업됐다고 계약서를 내민다. 콜센터 앞엔 어떤 대기업 이름도 없다고 물으니,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고 되묻는다. 선생님은 네가 학교의 자랑이라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면서 기존과는 다른 근로계약서를 한번 더 내밀어 서명하게 한다.


사무직에 취업됐다며 좋아하던 것도 잠시, 소희는 콜 수를 채우기 위해 야근을 한다. 오래 대기했다며 다짜고짜 욕을 내지르는 고객의 전화에 놀란 맘을 추스르고 다시 콜을 받는다. 인터넷 서비스 해지를 원하는 고객에게 상품권 지급으로 회유하는 덴 제법 익숙해졌다. 그러다 고객의 지독한 성희롱에 참지 못하고 화를 내지르는 소희. 팀장은 회사에서 내려온 실적 압박에 괴로워하지만, 소희의 고충을 듣고 어쩔 수 없다며 지친 표정으로 퇴근을 권한다.


그리고 다음날 팀장은 자살했다.


회사는 제대로 된 애도도 하지 않는다. 회사 직원 중 그의 장례식에 간 조문객은 소희가 유일했을 뿐 아니라 사측은 오히려 팀장의 유서 속 내부고발이 거짓임을 인정하는 데 서명하도록 압박한다. 소희는 거부하지만,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서명해 버렸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서 인센티브라도 받자, 아픔을 딛고 나아가길 택했다.


하지만, 다음 달 월급엔 여전히 인센티브가 포함되지 않는다. 고등학생은 현장실습생이라서, 인센티브를 바로 주지 않는단다. 너무 빨리 퇴사해 버리니 이탈을 막기 위해 두 달 후에 인센티브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희는 꾹 참아본다. 고객의 욕설도, 짜증도 다 버텨보기로 했지만,

두 달 후에도 인센티브는 없었다. 이유를 따져 묻는 소희에게, 새 팀장은 말한다.


“이래서 없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소희는 참지 못하고 팀장에게 주먹을 날리고, 강제로 무급휴직을 당한다. 집에 조용히 있다 엄마에게 힘겹게 말을 꺼낸다.


“엄마, 나 회사 그만두고 싶어.”

“대기업인데 거길 왜 나와. 어디든 힘들어.”




그러던 며칠 후, 소희는 목숨을 끊는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왜 소희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소희의 자살 후에도 여전히 다른 소희가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지 깊이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이면 근로계약서를 전하는 교사는 교육청으로부터 취업률에 연동된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는 학교의 사명에만 관심이 있다. 교육청은, 교육부 예산지원 시 타 지역 교육청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는 서로서로 책임을 전가한다.


“근로조건은요? 소희가 다녔던 회사가 작년에만 690명이 나가고 617명이 다시 들어왔어요. 그게 정상인가요?” 형사가 따져 묻는다.


“정성지표는 측정이 어려워서요. 정량지표를 활용할 수밖에 없어요.” 선생님도, 교육청 장학사도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교육계의 방관 덕분에, 회사는 마음껏 어린 학생들의 노동권을, 인권을 유린한다.


실은 내가 만약 예산을 지급한다 해도 정성지표를 설정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었다. 현장에 있는 공무원들이 샅샅이 챙겨보겠지 하면서 책임을 떠넘겼겠지. 나는 너무도 많은 기관을 평가하는 사람이니까, 평가는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하니 정량지표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것 같다.

그런데 잘못된 지표를 설정해 정책을 수립하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 소름이 돋는다.


현장에서 발버둥 쳐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길 바라며 공직에 입문했다. 하지만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과연 여기서 내가 무얼 바꿀 수 있을까 싶은 회의감.


그래도, 문제에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설명을 구하는 자세로 살도록 노력해야지. 남은 삶에서 충실히 실천하고 싶다. 비록 덧없는 몸짓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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