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성찰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뭐니?"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친구는 별로 없다.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고는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셈이다.
왜 그렇게 경쟁에 매달리는지 하고자 하는 것이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살펴보지 않고 가는 것은 눈을 감고 하는 달리기와 같다.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보려면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직장 사무실에 있는데 그 전에는 집에 있었다.
집에 있기 전에는 사무실에 있었고, 주초에 사무실에 와서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지속된 지 10년도 훌쩍 넘었다.
그전에는 서울에 살았다.
그전에는 포항에서도 살았다.
그전에는 서울 살면서 법당에도 나갔다.
그전에는 그전에는 그 전에는....
이렇게 거슬러 가다 보면 어느덧 엄마 뱃속으로 간다.
그렇다면 엄마 뱃속에 있기 전에 난 어디 있었을까?
결국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엄마 뱃속에서 생기기 이전에 없었다면 나는 내가 아닌 존재가 내가 된 것이 된다.
내가 내가 아니란 말인가?
골치 아프다.
이젠 내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보자.
올해 58세.
내년에는 59세가 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60대 70대 80대를 겪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죽는다.
죽은 다음에는?
결국에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죽은 이후에도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진짜 나일까?
이 또한 골치 아프다.
지나온 삶은 돌아볼 수 있다.
앞으로 맞이할 삶은 상상할 수 있다.
과거든 미래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둘은 차이가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되돌린 수 없다.
그런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일이라. 마음먹기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다.
과거는 이미 확정되었고 미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는?
현재는 진행 중이다.
과거부터 가져왔던 습관이나 기질 같은 것을 바탕으로 현재 마주하는 새로운 자극들에 대응하면서 삶이 이뤄지고 있다.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특정되고 있는 것이 현재이다.
그리고 실제로 삶은 현재로 경험된다.
과거는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고 미래는 상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지만 현재는 생생하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데 얼마나 자유롭게 창의성을 가지고 할 수 있을까?
이미 굳어버린 습관대로 좁게 보고 있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서 '일 안 하고 편하게 놀고먹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하자.
놀랍게도 요즘엔 이런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많다.
워낙 어려운 경제 형편이 지속되다 보니 생계 걱정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이 욕구가 그의 진짜 욕구일까?
현실에서 느껴지는 사정과 형편에 따라서 무엇을 바랄 수 있는지 한계를 정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타협하듯 갖게 되는 욕구가 과연 진정한 욕구일까?
편하게 놀고먹고 싶다는 사람한테 뭘 하며 놀고 싶으며 뭘 먹고 싶은지 묻는 것은 맥락을 놓친 엉뚱한 질문으로 보일 수도 있다.
'편하게 놀고먹겠다.'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을 생계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어떻게 놀고먹을 것인지 질문하면 왜 이런 욕구를 갖게 되었는지 찾아갈 수 있다.
욕구를 쫓아서 그 욕구의 뿌리를 찾는 데 있어서 처음에 이야기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찾아보았던 방식을 써보면 결국 욕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왜 놀고 싶은가?
힘든 것이 싫기 때문이다.
무엇이 힘든가?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할 때 힘들다.
왜 하기 싫은가?
....
이 여정도 또한 결국 '알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고 만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찾아가다 보면 어떤 것을 찾았더라도 그것을 원하게 된 이유가 정해져 있지 않다.
결국 그냥 내 마음대로 선택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모든 것이 달려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을 뜻대로 쓰는 만큼 행복하고 그렇지 못한 만큼 불행할 것이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왜 내 마음인데 마음대로 안 될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