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라는 이름표

효자_18회

by 광풍제월

효자라는 이름표

2026.2.14. 토


퇴직 후 나는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직함이 사라지고 역할이 비워지자,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나의 모습들이 하나씩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중 가장 오래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정말 효자였을까. 아니면 효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온 사람이었을까.


내가 자란 곳은 안동 지역의 산촌 마을이었다. 유교적 질서가 공기처럼 스며 있던 동네였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본관이 어디냐”, “파는 무슨 파냐”, “어른 함자는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인사처럼 이어졌다. 나는 또박또박 답을 외웠고,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을 말하는 아이는 집안을 빛내는 아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일이다. 마을 어른이 땅콩 몇 알을 주셨다. 나는 그것을 먹지 않고 들에서 일하시던 할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순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 일은 오래 남았다. 어머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우리 아들은 땅콩을 먹지 않고 할아버지께 먼저 드린 효자”라고. 그 말은 칭찬이었고, 동시에 기준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효자 아들’로 불렸다. 무엇을 하든 한 번 더 생각했다. 이 선택이 효자라는 이름에 어긋나지 않는지. 어린 나는 어느새 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화를 크게 내지 않는 아이, 어른을 거스르지 않는 아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이.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네의 시선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마음속의 기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를 실망시킬 것 같은 순간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죄책감이 따라왔다. 효자라는 말은 칭찬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조용히 지켜보는 눈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친척들이 오면 “무슨 파냐”고 물었다. 나는 큰소리로 “건구당파”라고 답했고, 사람들은 똑똑하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한자를 배우고 족보를 들여다보다가 그것이 ‘긍구당’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틀린 이름을 확신에 차서 외치고 있었던 셈이다. 아무도 바로잡아 주지 않았고, 나 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정답처럼 보이는 쪽으로만 정확하려 했다. 효자라는 이름도 그와 닮아 있었다. 내가 스스로 묻고 답한 효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모양을 성실히 따라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효는 형식이 아니라 온도에 가까운 것 같다. 부모님께 말을 건네고, 손을 한 번 더 잡아 드리고, 어깨를 잠시라도 주물러 드리는 일. 거창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이제는 두 분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다. 효자라는 이름은 남아 있지만, 정작 그 손을 오래 잡아 드린 기억은 많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타인이 붙여준 이름에 맞추어 살아왔다. 그 이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묻고 싶다. 효자이기 전에, 나는 어떤 아들이었는가.


이제는 이름표를 내려놓는다.

조금 늦었지만, 효자라는 역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들로 다시 서 보려 한다.

20251001_121812.jpg 유년시절 내가 자란 산촌마을(202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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