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홍매화_24회
퇴직 후 맞는 첫 봄, 통도사 홍매화 앞에서
2026.3.2. 월 (D-304)
퇴직 후 맞는 첫 봄이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월요일 아침, 달력 속 3월 2일은 비어 있었다. 시간은 생겼지만 방향은 아직 선명하지 않았다. 아내와 상의 끝에 남쪽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봄을 가장 먼저 연다는 매화를 보러. 목적지는 통도사였다.
네 시간 남짓 달려 도착했을 때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맑은 하늘 대신 잔잔한 빗소리가 길을 채우고 있었다. 완벽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날의 매화에는 이런 배경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산문을 지나 소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나무들은 곧게만 서 있지 않았다. 빛을 찾아 몸을 틀고, 바람을 견디며 방향을 바꾼 흔적이 보였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곧은 삶을 이상이라 말하지만, 실제의 시간은 대개 이렇게 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자 홍매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 속에서는 화사해 보였지만, 눈앞의 꽃은 묵직했다. 빗방울을 머금은 붉은 꽃잎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피는 꽃은, 가장 먼저 추위를 견딘 존재라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 났다.
일찍 피었다는 것보다, 오래 버텼다는 시간이 더 크게 다가왔다.
곁의 백매화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맑고 조용했다. 은은한 향이 빗속에서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서두르지 않고 제 철에 피어나는 태도. 인생 2막을 준비하며 내가 닮고 싶은 모습도 그와 닮아 있었다.
경내를 돌다 통도사 대웅전 앞에 섰다. 불상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라 한다. 형상이 없으니 오히려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채워진 이력보다 견뎌 온 시간이 더 본질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 벽면의 작은 흰 점을 두고 우담바라가 피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삼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이라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대를 안고 이곳에 왔고, 작은 흔적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전환기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확실한 증거보다,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믿음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다시, 무풍한송로를 걸었다. ‘무풍(舞風)’은 바람이 춤춘다는 뜻이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모습이 춤추는 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빗속의 소나무들은 조용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거세게 저항하지도, 과장되게 흔들리지도 않았다. 바람을 거슬러 서는 대신, 바람과 함께 움직이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봄이 오기만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여건이 갖춰지면, 준비가 끝나면 시작하겠다고 미루어 두었던 시간들. 하지만 홍매화는 누가 불러서 핀 것이 아니었다. 때가 되자, 추위를 견딘 힘으로 조용히 피어 있었을 뿐이다.
빗속의 홍매화는 봄의 상징이라기보다, 겨울을 통과한 존재의 표정에 가까웠다. 무풍한송로를 걸으며 알게 되었다. 봄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날, 내 안에서 시작되는 봄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