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야,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지
<2부>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야,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지
낭만파 원론주의자(?)들과 가끔 '낭만'의 영문적 해석에 대해 토론하곤 한다. 다른 게 아니라 '낭만'이란 단어의 영문적 번역인 'Romance'가 맘에 들지 않아서가 그 이유였다. 어째서 낭만의 번역이 로맨스가 될 수 있냐는 데서부터 비롯된 불씨였다. 굳이 어원의 유래를 따지자면 서구권에서의 'Romance'는 순수하게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뜻한다. 중세시대 기사도 문학의 비일상적인 모험과 사랑이야기가 모두 로만자로 기록되면서 로만자로 쓰인 책이라는 의미의 로맨스라는 단어가 어원이 되었다. 이후에 문학사가 발전하면서 로맨스라는 장르로 정립되었다. 그런데 이 로맨스라는 단어가 번역될 때 '낭만'으로 번역된 원흉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로망(roman/romance)을 한자를 사용하여 음역 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표현을 한자 그대로 가져와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낭만이라는 표현으로 정착되었다.
낭만은 사전적 의미로만 봐도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로 정의된다. 물론 로맨스 문학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만 사랑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언제나 이야기의 끝은 달콤한 사랑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로맨스가 낭만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낭만이란 단어는 너무나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이란 것은 차가운 현실로 인해 간혹 고통스럽기도 하고 종종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음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낭만은 어려운 길,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이었으니까. 그래서 종종 우리는 낭만을 대체할 새로운 영단어를 만들던가 아니면 로맨스를 뜻하는 단어를 낭만이 아닌 새로운 순우리말로 대체하거나 하는 식의 논쟁을 이어가곤 했다.
낭만파 원로주의자들처럼 이런 소모적인 논쟁에 열띤 목소리로 제각각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내세우는데 혈안인 바보들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바보들 중의 하나였다.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라 주장하면서도 우리는 달콤한 로맨스 소설보다도 더 낭만에 집착하는 바보들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의 일부에 해당하는 달콤한 로맨스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낭만의 전체를 사랑했다. 낭만은 실패와 고통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낭만을 사랑했다. 슬프고 우울했지만 그럼에도 낭만을 사랑했다. 우리는 그런 바보들이었다.
30대가 되어보니 낭만을 간직하는 삶이 얼마나 고된지 그리고 현실이 얼마나 차가운지 깨닫게 되었다. 사랑만 할 수 있으면 모든 걱정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20대를 지나 현재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자본주의적 사고에 물들어 그렇게 그렇게 굽이 친 물결에 휩쓸려 사는 삶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니 잘못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나도 남들처럼 차가운 현실이 두려운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낭만을 내 인생에서 지운 것에 대한 자기혐오와 분노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쉽게도 현실에서의 나는 가진 것 없는 사람이었고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사랑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낭만의 시대처럼 가진 것 없어도 사랑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시대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낭만을 놓게 되었다. 낭만이 사랑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낭만이 사랑을 허락하는 것이 아닌 물질만이 사랑을 허락한다는 현실에 낙담하며 낭만 대신 현실을 쫒고 물질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낭만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나 낭만이 없는 삶은 분명 고통이 없는 삶이어야 했지만 그와 반대로 내 인생은 슬프고 우울했다. 분명 현실적인 것을 쫒다 보면 상황이 나아질 테고 그렇다 보면 분명 사랑을 할 만한 여유도 생길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또 그렇지 않았다. 아득바득 현실에 메여가며 살아간다 해도 당장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장 나아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나 자신을 자책하며 비관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현실은 내게 더 차갑기만 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너무 뜨거워서 차가워지려 했더니 이제는 너무 차갑기에 나 자신이 너무 굳게 얼어버렸다.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게 되었다. 낭만은 내 인생의 모든 즐거움이자 기쁨이었는데 이 모든 걸 잊고 지낼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가운 현실은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잃은 내게 삶을 살아감에 있어 뜨거운 낭만도 필요함을 일러주었다.
현실은 차가운 바다와도 같다. 그리고 우리는 차가운 바다 위 작은 배다. 그러나 그 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따스한 바람이 필요한 법. 결국 낭만이 다시 한번 차가운 현실 속에서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낭만이 있었기에 삶을 더 열심히 살아갈 뜨거운 열정도 피어날 수 있었고 반면에 너무 뜨거워질 때마다 차가운 현실은 내게 인내를 고하기도 했다.
낭만은 회광반조처럼 촛불이 꺼지기 직전의 가장 밝은 불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낭만은 격렬하게 불타오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모닥불처럼 천천히 오랫동안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그리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그 불꽃을 지긋히 감상하는 것이 낭만적인 삶이다. 그런데 이러한 낭만적인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차가운 현실의 온도 조절이었다. 나의 불꽃이 너무 빠르게 타들어가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그동안 이성과 감성, 차가운 현실과 뜨거운 낭만이란 이분법적인 사고로 세상을 바라봤다. 그러나 인생은 적정한 온도와 균형을 유지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냉정해질 필요도 있었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는 뜨거운 낭만도 필요했다. 그동안 내게서 낭만을 지운 차가운 현실을 증오했지만 나의 인생에 있어 차가움도 필요함을 깨닫게 된 이후로 이성적 선택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낭만을 쫒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실패와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이제는 그 과정마저 사랑하고 반길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실패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현실적인 선택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과정도 낭만적인 인생의 모든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현실적인 선택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인고의 시간을 버티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낭만을 더 오랫동안 꿈꾸도록 만들었다. 반대로 낭만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잃지 않게 했고 그 결과 현실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인생은 차가운 현실과 뜨거운 낭만 모두가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하루 24시간 중 매직아워는 아주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빛은 하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빛을 선사한다. 낭만은 마치 매직아워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빛이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낭만적인 인생은 그 순간이 전부가 아니었다. 매직아워가 떠오르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시간을 인내하고 기다리는 모든 연속된 시간 전체가 낭만적인 인생이었다. 가장 아름답게 빛나기 위해 찰나의 순간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닌 인생이란 긴 호흡 속에 천천히 매직아워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모든 순간이 내겐 낭만이었다. 차가운 밤이 찾아오기도 뜨거운 해가 뜨기도 하는 것처럼 반복된 하루 속에서 현실과 낭만을 오가며 매직아워를 기다리는 것이 나의 낭만이자 인생이었다.
낭만을 쫒다 차가운 현실 때문에 아픈 것도 싫었지만 낭만 없이 사는 내 인생이 슬프고 우울한 건 더 싫었다. 그래서 슬프고 우울해도 다시 한번 낭만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99번 실패하더라도 딱 한번 낭만이 내게 주는 행복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니까.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닌,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라서 가끔은 슬프고 우울하지만 그래도 낭만을 사랑하고 싶은 이유이다. 대신에 이제는 조금 더 현명하고 슬기롭게 차가운 현실과 뜨거운 낭만 사이 여백을 채워나가며 낭만을 오랫동안 지켜나가는 삶을 그리고자 한다.
낭만은 인생이란 긴 과정 속에서 천천히 따르는 물과도 같다.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천천히 차오르던 물이 어느 순간 넘쳐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어느 순간 찾아오겠지. 사랑도 그렇게 언젠가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