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야,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를 작년 즈음 힘든 시기에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단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바로 이 책을 너무 뒤늦게 읽었다는 아쉬움과 후회였다.
아무리 책이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더라도 그 책을 처음으로 접하는 순간은 다 각자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책들은 보통 어린 시절에 일찍 접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실의 시대'를 이제야 접한 건 상당히 때가 늦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30대가 결코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작가의 말처럼 같은 청춘이어도 이왕이면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이제 갓 대학생이 된 20대 초반 일 때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렇게 아쉬움을 호소하는 이유는 나의 20대 초반엔 상실을 알지도 배울 수도 겪어보지도 못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인 경험 대신 책을 통해서라도 상실이란 것을 깨우쳤으면 하는 그런 아쉬움이었다. 상실은 너무 잔인하니까.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보면서 가장 먼저 나의 20대 초반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작품 속 주인공과 나를 비교하며 그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사랑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처음부터 작품에 몰입하고 비교할 생각은 없었다. 작품 속 배경인 1960년대 후반 일본은 내겐 너무나 이질감을 느끼게 만든 배경이었다. 무려 우리 부모님의 젊은 시절이 아닌 그보다 한참 이전의 태어난 시기의 과거였고 심지어 타국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수록 그런 이질감은 소멸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바뀌었더라도 사람 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 비슷비슷 하는구나를 느꼈다. 대학생활을 하며 강의를 듣는 것,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 식당에서 데이트를 하며 식사하는 것, 술을 마시며 이성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것 등 1960년대 일본의 젊은 대학생의 일상은 나의 대학생 시절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와 나는 대학생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과거의 사람과 현재의 나는 많이 다를 거라는 편견을 가졌었다. 그러나 시대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은 아니었다. 인간 고유의 삶은 큰 틀에서 봤을 때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아픔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것,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인간사의 중요한 가치들이었다. 이런 동질감과 공감대 덕분에 이 책이 시대를 막론하고 현재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그와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주인공 와타나베와 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대'였다. 그는 '상실의 시대'를 살았고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물리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니까. 그가 '상실의 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낭만의 시대'를 살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물론 달콤한 로맨스가 낭만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낭만이다. 그가 사랑을 상실을 통해 배웠다면 나의 사랑은 낭만을 통해 비롯되었다. 그의 사랑은 아픔이 동반되었고 나의 사랑은 철저히 아픔을 배제했었다. 결국 그와 나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친한 친구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이자 죽은 친구의 연인을 사랑했던 것, 새로운 인연들과의 얽히고 얽힌 관계들 그리고 다시 한번 첫사랑의 죽음까지 분명 그의 서사는 극적이면서도 평범한 것과는 궤가 달랐다.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은 죽음이 삶과 대조적인 것이 아닌, 삶의 저 편에 있는 것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으며 상실은 삶에서 언제든지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음을 그는 이미 이른 나이부터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모든 현상과 관계에 대해 일정 이상 거리를 두는 자세를 고수했다. 그럼에도 그와 나오코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죽음 이후 그녀의 연인이었던 나오코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나오코는 친언니의 자살과 남자친구였던 기즈키의 연속된 자살로 인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녀가 나아지길 희망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그가 겪었을 사랑의 무게는 가히 내가 떠올릴 수 조차 없는 그런 무거운 사랑이었다. 그는 조금은 이른 나이에 조숙하지만 그럼에도 성숙했던 아프고 힘든 사랑을 했다. 가장 순수했을 시절의 첫사랑이 남들처럼 달콤한 로맨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랑했던 나오코의 자살은 그에게 또 다른 상실이란 거대한 파도와 같았으며 그를 다시 절벽으로 내몬 다음 상실의 아픔이란 망망대해로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즈키의 연인이자 와타나베의 첫사랑이었던 나오코는, 상실의 아픔이란 바다에서 쉽게 헤엄쳐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상실의 아픔이란 바닷속으로 빠지게 되어 다시는 물 밑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
와타나베를 좋아했던 미도리는 밝으면서도 독특한 사람이지만 그녀 역시 내면의 상실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온전히 의지할 데 없던 그녀 역시 급변하는 시대 속 세상을 살아가는 작은 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시대상을 고려하면 상당히 거침없고 파격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자유로운 사고가 세상에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가운 시선과 무수한 억압이 따라왔다. 그녀는 밝고 생기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그 이면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해 줄 가족도 주변 사람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나오코의 룸메이트였던 레이코는 마음의 병이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아이와 함께 평화로운 가정을 이룬 번듯한 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동성애자로 낙인찍혔고 이에 모자라 상대방 여성을 겁탈하려 했다는 음모로 인해 다시 마음의 병에 시달리며 사회에서도 사랑했던 가족들에게서도 버림받은 비운의 여자였다.
등장인물 모두가 각자만의 상실을 간직한 채 그렇게 상실의 아픔이란 바다 위를 헤엄치며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간다. 그들의 절망과 아픔을 가히 진심으로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전부 고통스러운 것들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에 반해 나의 20대 초반은 상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별히 소중한 사람이 나를 떠났다던가 삶이 버거울 정도로 힘든 일이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내겐 화목한 가정이 있었고 달콤한 첫사랑을 나누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즐긴 청년이었다. 단순히 나의 환경이 타고나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에 내게 있어 인생은 낭만이었고 낭만은 항상 행복하고 달콤한 로맨스라고 믿고 있었다. 가끔 주어지는 시련도 내가 더 빛나게 도와줄 수 있는 극복 가능한 장치 정도로 치부했다. 나 자신과 내 인생이 무너질 정도의 어떤 큰 난관이 내게 닥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만큼 오만했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러한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행복하고 달콤한 핑크빛 로맨스만 가득할 것 같았던 내 인생도 결국 나의 오만함 때문에 무너지게 되었다. 현실감각이 없는 나의 이러한 극단적인 낙관주의와 낭만주의는 결국 사랑했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날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사람이 되었다. 낭만을 혐오했고 나 자신을 부정했다. 그리고 사랑의 실패가 불러온 상실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나의 상실이 책 속 인물들만큼 또는 지금도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과 비교해서 더 큰 파도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건 개인의 가치관마다 다르니까 내겐 의미 없는 논쟁이었다. 돈이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뺏을 경우 그 사람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내겐 사랑과 낭만이 인생의 전부였다. 책 속 등장인물들도 상실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아픔은 자신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걸 앗아갔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나 또한 상실은 내게서 가장 소중한 낭만과 사랑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만일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상실이란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일찍 접할 수 있었다면 잃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잔인하고 고통스러운지 깨닫지 않을까 싶었다. 이러한 후회가 무색하게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왜 이제야 때 늦은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된 것일까 하는 아쉬움만 들이킬 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상실을 겪고 나서 상실의 시대를 접하게 된 건 단순 우연이 아닌 내게 꼭 마주하고 일어나야 할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나도 이 책의 등장인물들처럼 상실을 간직했기에 이들의 상실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만약 과거의 내가 이 책을 일찍 접했더라도 진심을 다해 상실을 공감하고 간직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감명 깊은 소설책 중 하나로만 기억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침 내가 책을 읽었던 시점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였다. 나도 등장인물들과 똑같이 각자만의 상실의 바다에서 허우적 대듯이 나도 슬픔 속에 나를 던졌고 그 안에서 헤엄도 치지 못하고 방향도 모른 채 허우적 댈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마치 이런 나의 비극적인 상황을 알고 있던 듯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방향을 찾고 나아갈 수 있는 단서를 남겨두었다. 그리하여 나는 책 속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그 단서가 무엇인지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내게서 가장 소중한 걸 빼앗은 상실이 그 단서의 주인공이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상실의 바다 위에서 방향을 찾고 나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세 인물, 와타나베와 미도리 그리고 레이코는 그들 각자의 방식대로 상실을 간직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와타나베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위에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와 주변인물들 간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첫사랑인 나오코에 대한 애착과 그로 인한 미도리와의 더딘 애매한 관계 그리고 레이코와의 은밀한 관계까지 그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나오코의 죽음 이후 그는 오랜 시간 방황하다 그동안 비밀로 했던 나오코와의 일화를 미도리에게 들려주기로 마음을 먹고 그녀에게 연락을 한 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을 끝으로 소설은 마무리하게 된다. 열린 결말이지만 나는 그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있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었다. 미도리에게 솔직하게 나오코와의 일화를 얘기함으로써 본인이 현재 상실이란 바다 위에 표류하고 있다는 자신의 현 위치를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미도리와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상실의 바다 위를 헤엄쳐 빛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결정을 하고 극적인 사랑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오코라는 이름의 상실이라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둠 속에 있었기에 빛이 더 간절한 것처럼 나오코와 미도리, 너무나도 다르면서 서로 대비되는 두 사람이었기에 미도리는 그의 아픔을 감싸주고 부족했던 사랑을 채워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 될 수 있었다.
미도리 또한 시종일관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던 와타나베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밝고 생기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내면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알아봐 주고 세상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봐 준 그였기에 그녀는 와타나베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확고하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대해준 와타나베는 그녀에게 있어 빛이었다. 상실의 바다 위를 비추는 등대였다. 그녀는 교제했던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그녀 또한 세상과 사랑의 상실 속에서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나오코의 룸메이트였던 레이코는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지켜보며 그들이 서로 상처를 공유하고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얻고 용기를 얻어 그녀도 그녀 자신의 상실을 받아들여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했다. 소설 말미에 와타나베와 레이코는 나오코와의 추억을 정리하면서 각자의 새로운 도전과 시작을 축복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새로운 사랑을, 레이코는 마음의 병 때문에 그만두었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찾은 단서는 이들이 각자의 소중한 것들을 위해 나아가게 된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상실을 극도로 경계했던 이유는 내게 있어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상실은 나의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종료 버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상실을 동력원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이들이 이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나처럼 상실을 경계하여 현실과 상실을 분리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공존시켜 내가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어디로 나아가고 싶은 지 깨닫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와타나베는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상실과 사랑, 상실과 낭만은 공존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 이면엔 거대한 상실이 존재한다. 낭만적인 승리, 그 이면엔 수많은 실패와 시련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린 실패 뒤에 성공이 찾아온다는 인생의 진리를 어쩌면 단지 이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대부분 실패를, 상실을 동력원으로 쓰는 사람은 극소수일 테니까. 실패 뒤에 성공은 자연히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상실을 극복했기에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와타나베처럼 삶과 죽음, 상실과 사랑은 한데 어우러진 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동력으로 이용했기에 가능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들의 서사는 와타나베와 기즈키 그리고 나오코, 다시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 또다시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레이코로 이어지는 돌고 도는 삼각관계와도 같다. 그리고 이들의 서사가 마치 둥근 원이 아닌 잘 굴러가지 않는 삼각형이지만 겨우겨우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구도와 비슷해 보였다. 그의 인생은 둥근 원처럼 나아가는 것이 아닌 잘 굴러가지 않는 삼각형의 모습을 띄고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아가는 것이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더라도 그러다 보면 언젠가 삼각형이 깎이고 깎여 점점 잘 굴러가는 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 과정 자체가 모두 낭만이었다.
여담으로 나는 '어벤져스 : 엔드게임'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 이 영화의 메시지 때문이다. 최대의 적, 타노스를 물리치고 '복수'에 성공했지만 영웅들이 시간여행을 통해 떠났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던 계기는 이들에게 상실의 슬픔은 종료 버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복수의 성공으로부터 오는 생존의 기쁨이 아닌 그 보다 더 거대한 상실의 슬픔 때문에 엔드 된 게임을 뒤집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던 것이었다.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가 아니고 실패와 고통임에도 낭만을 사랑하고 싶은 이유이다.
지금도 가슴이 시려오지만 때 늦은 상실의 시대를 읽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상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 또한 와타나베처럼 그리고 어벤져스 영웅들처럼 상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닌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동력원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와타나베와 나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이제는 같은 시대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상실과 낭만이 공존하는 시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