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시대

<3부> 그럼에도 낭만을 사랑하는 이유

by 깜지

인류 역사 속 가장 낭만의 색이 짙었던 하나의 시대를 꼽자면 어느 때 일까?

낭만주의가 꽃피우던 18~19세기? 낭만주의의 현대적 사조와 특징들이 계승된 수많은 예술이 공존하고 문화가 발전된 20세기? 아니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는 어떠한가?



나는 가끔 유튜브를 통해 시간여행을 하고 오면 내가 어렸을 때인 2000년대 초반이 그리울 때가 있다. 90년대~00년대 사이에는 참 재밌고 다양한 일들과 사건사고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시대적 허용이 허락한 낭만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도심 한복판에서 자식처럼 키운 멧돼지를 운송수단 삼아 도심을 배회하는 할아버지 영상의 한 댓글을 보고 한참 웃은 기억이 났다. 그 댓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2000년대, 낭만의 시대'. 또 다른 영상에서는 최민식 배우님이 인부의 삶을 체험하시고 나서 현장에서 목재에 붙은 불쏘시개로 담뱃불을 붙여 피는 모습을 모자이크 없이 방송에 송출되는 영상에서도 비슷한 댓글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 옛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자유롭고 정감 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아내는 낭만이 그 시대를 관통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다른 의미의 자극(?)적인 그러한 추억 보정 영상만이 그 시대의 낭만 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아빠와 나는 2002년 월드컵 영상을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IMF라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넘어지고 꺾이며 상처받았던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맞이한 2000년대, 그 200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세계적 축제여서 그런지 모두에게 힘듦과 아픔이 있었기에 그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당시에 어렸었던 나는 광화문 광장에 나와 전 국민이 대동단결 했던 그 역사 속에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언더독이 역경을 이겨내고 이뤄낸 짜릿한 국가적 낭만의 승리였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 국민 모두가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랜 역사 속에서부터 모진 핍박과 승리가 반복된 낭만 DNA가 각인된 민족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매번 했다. 그래서 지금도 틈만 나면 그때를 그리워하며 추억에 빠지는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과거의 추억에 빠져 옛날을 그리워하는 데에는 아쉽게도 잔인한 이유가 있다. 당연하게도 현재가 그러하지 못해서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느낌표!'라는 방송의 '눈을 떠요'라는 코너는 시각장애인들에게 각막 기증 및 이식수술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돕는 기적과도 같은 메디컬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그때에는 주말만 되면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가족 예능을 시청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훈훈하고 마음 따듯해지는 그런 예능을 아쉽지만 찾아보기 힘들다. 당장의 우리 부모님만 하더라도 자극적인 예능만 찾아보기 바쁘시다(물론 그런 예능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낭만의 색이 옅은 현재를 비관하며 비판만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단지 지금은 노을이 질 때가 되었을 뿐이다. 낭만의 시대는 항상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를 배제한 채 과거에 머물며 추억으로만 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아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알고 있다. 지금의 시간이 다음 시대의 낭만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밤 중이라는 것을. 원래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고 빛이 있기에 어둠도 있는 법인 것처럼 다음 낭만의 시대를 위해 잠시 어둠도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과열된 낭만은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녹아 사라질 뿐이니까.



18~19세기 낭만주의는 통일적이고 규범적인 고전주의에 반발하며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20세기의 거대한 전쟁을 맞이하며 낭만주의는 다시 한번 큰 도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은 갖은 멸시와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 속에서도 낭만은 그 근본적인 정신과 사조들이 예술과 문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어 다시 한번 새로이 꽃 피울 수 있었다. 한국의 퇴폐적 낭만주의 현대 문학 또한 일제강점기 속 실패와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지금 시대만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시대의 싸움은 갈등과 혐오, 과열된 개인주의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현실의 흐름을 억지로 비틀 수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나 내일의 노을이 다시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믿고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낭만파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우리 낭만파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각자의 낭만을 간직하고 지켜내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개인의 낭만이 집단적 낭만주의로 이어지기까지는 매우 큰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우리 모두 각자의 싸움을 할 때이다. 더 이상 자유롭고 정감 있던 2000년대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낭만은 없을지라도 새로운 시대의 낭만이 오기 위해서는 어쩌면 꼭 지나가야 할 눈길이라 믿고 싶다. 아름다운 모양으로 남기고 싶지만 발자국을 남겨야만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낭만이 배척받는 시대에 사는 낭만파들이여, 부디 현재가 힘들어 과거가 그리울 때마다 나의 메시지를 꼭 기억하길 바란다. 과거가 그립더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낭만을 꿈꾸며 간직하고 지켜내어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기를.



나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낭만주의를 개척하고 싶은 파이오니어가 되고 싶다. 낭만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그 모습과 정의는 매번 바뀌었다. 다음 시대의 낭만은 이전과 비슷한 모습일지 아니면 낭만의 새로운 정의가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를 결정하는 건 다음 세대와 새로운 시대의 몫이다. 우리의 몫은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간직했던 낭만을 잘 전달해 주면 되는 전달자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나의 윗세대가 지켜낸 낭만을 우리에게 다시 선물해 줬기에 그 유지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현시대가 낭만을 배척할지라도, 낭만을 꿈꾸며 간직하고 지켜낼 수 있다면 낭만의 시대는 어제의 노을과는 다른 내일의 노을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물론 나의 낭만은 최초의 낭만주의와 비교해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상상 속 만화 주인공인 것처럼 인생을 살고 있으며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인생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조용한 카페에서 홀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시를 쓰고 바람에 휘부끼는 아레카 야자를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낭만의 세계,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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