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저녁을 위한 유료 서비스 3종 세트
올해부터 내가 풍요롭고도 게으른 여가 생활을 위해 이용하게 된 유료 서비스는 3개이다. 유튜브 프리미엄, 넷플릭스, 밀리의 서재.
이 중 가장 많이 이용한 건 단연코 유튜브 프리미엄이다. 광고 없는 유튜브는 정지 신호 없이 쭉 뻗은 도로 같다고나 할까. 빨간불에 멈춰서거나 노란불에 지나가려고 애쓸 필요 없이 쭉 달리기만 하면 된다. 5분도 안 되는 영상을 보기 위해 매번 광고를 봐야 했던, 심지어 거의 같은 광고가 반복하여 떠서 다 보고 나면 결국 CM송만 선명하게 기억에 남던 일반 사용자 시절을 생각하면, 아, 월급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하는 한 해였다.
넷플릭스 역시 나의 여가 시간을 든든하게 책임져 주었다. 사실 때로는 과할 정도로 책임져 주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을 며칠 간 연달아 볼 때는 잠이 부족해도 행복했다. 넷플릭스에는 잠깐 넋 놓고 보기 좋은 가벼운 영화나 드라마, TV 프로그램도 많지만 꽤나 긴 여운을 지닌 콘텐츠들도 많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성향의 독자들에게 괜찮은 콘텐츠들을 추천해주는 글을 연재해볼까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도 했다. 컨셉은 "이제 넷플릭스의 바다에서 그만 시간을 죽이고 싶은 당신을 위한 심폐소생 추천 리뷰" 정도로. 음, 막상 써놓고 보니 너무 거창한 컨셉이긴 하다.
밀리의 서재는 사실 유튜브나 넷플릭스에 비하면 이용도가 현저히 낮았다. 명색이 도서 리뷰를 쓰는 사람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집에서는 종이책 위주로 읽다 보니 주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 밀리의 서재를 이용하고는 했는데 올해는 지하철 타고 멀리 갈 일이 별로 없어 더더욱 그러했다. 내 서재에 찜해 놓은 도서는 잔뜩 있지만 끝까지 다 읽은 작품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만큼 독서는 여타 비슷한 감상 행위들 중에서도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감상 행위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취미가 독서라고 하면 상대방에게서 "오" 하는 감탄 반 의심 반의 반응이 튀어나오기 마련인가보다.
그럼 이제 취미를 묻는 물음에 독서가 아닌 유튜브나 넷플릭스 감상을 적을 거냐고? 아니. 나는 여전히 뻔뻔하게 내 취미는 독서라고 적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 독서는 시간을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올해 내가 유튜브 혹은 넷플릭스와 함께 보낸 수많은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콘텐츠 자체에 대한 기억은 선명한데 그 외의 것들은 다소 어렴풋하다. 그런데 밀리의 서재와 함께 보낸 짧은 시간은 뭐랄까, 그 때의 시공간 전체가 함께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느낌이다. 첫 장을 넘기며 이 책이 과연 내가 긴 시간을 들일 만큼 나와 궁합이 맞는지 탐색할 때의 그 기분, 일정한 간격으로 페이지를 터치하여 넘기는 손가락에 와 닿던 공기의 온도, 그 온도가 전해 주던 계절감, 휴대폰에 박힌 글자들 너머로 배경처럼 놓여 있던 덜컹거리거나 혹은 고요했던 풍경들, 마음에 드는 문장에 그은 밑줄들의 형태와 색깔, 이런 온갖 것들이 생생하게 들어차 있다.
그렇다고 책이 영상보다 고상한 매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영상을 본 기억이 어떤 책을 본 기억보다 더 총체적이고 생생한 사람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다만 아직도 내 안에는 일주일에 한 번 동네를 찾아오던 북버스를 간절히 기다리던 꼬꼬마가, 토요일마다 도서관으로 놀러 가던 중학생 소녀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이렇게나 재미있는 것들이 잔뜩 생겨 버렸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