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사소할수록 힘이 있지
오전 11시의 햇살이 도시를 비춘다. 도로도 인도도 한적하다. 나뭇잎들은 딱 알맞게 색이 바래 있다. 어딘가 꼭꼭 숨어있던 길고양이들이 양지로 나와 기지개를 켠다. 병원에 가기 위해 조퇴를 하는 길임에도 모든 풍경이 다정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직장인에게 일터 밖에서 맞이하는 평일 오전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법의 시간이자 일탈의 시간이다.
그러고 보면 아직 학생일 때도 어쩌다 조퇴를 하게 되면 딱 이런 기분이 들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한 기분.
지금보다도 훨씬 더 소심했던 십대 시절의 나는 정말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엔가는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온 몸이 떨리고 입술과 손톱 색이 파랗게 변하였는데도 그냥 꾹 참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다음 교시가 되어도 여전히 그러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짝이 선생님에게 "얘 많이 아픈 거 같은데요."하고 말해주었고 선생님은 내 이마에 손을 갖다 대자마자 바로 나를 조퇴시켜 주셨다.
그 날 열에 들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걸음걸음 설레던지. 그 때도 꼭 이 계절쯤이었다. 너무 요란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색으로 물든 가로수들이 기억난다. 정작 그렿게 조퇴를 한 뒤 무엇을 하였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나중에 오늘을 뒤돌아봤을 때도 그렇지 않을까. 어디가 아팠는지도 진료 후에 무엇을 했는지도 다 잊어버리겠지만 가을 햇살이 다정하던 오전 11시의 풍경만은 마음 언저리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짧은 순간들이 오히려 더 깊숙한 곳에 박혀 반짝반짝 빛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