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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Dec 13. 2020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다

가구는 처음이라서

올해 다들 집에 있는 생활이 길어지면서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인테리어 관련 주식에 투자한 동료 한 분이 최근 꽤 수익을 봤다고 하는데, 음, 사실 내가 바로 그 수익에 일조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2주 정도 브런치에 글을 한 줄도 올리지 못한 이유를 고백하자면 퇴근 후 시간을 오롯이 컴퓨터 앞에 앉아 가구와 커튼, 각종 소품들을 고르는데 쓴 탓이다. 그럴싸하게 생활이 바빠서였다고 하고 싶지만 사실 일이야 늘 바쁜 거니 잠시 글 쓰는 시간을 못 낸 이유로는 구차한 변명이다.


나의 지난 몇 주를 돌이켜 보자. 인테리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접속하게 되는 ‘오늘의 집’ 사이트에서 매일 다른 사람들의 집 사진을 구경하고, ‘한샘’과 ‘리바트’와 ‘이케아’ 사이트 창을 번갈아 띄워놓고 비슷한 제품들의 사이즈와 가격을 비교하며, 가격도 싸면서 디테일까지 완벽한 물건이란 유니콘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아 가면서도 늘 희망을 떨치지 못한 채 나날이 검색 스킬을 키워나갔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럭저럭 인테리어에 대한 무수한 탐색과 고민과 지출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 오늘 드디어 오랜만에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었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었다. 작년에 읽은 책이라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작가의 문장은 거듭 읽어도 좋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갖게 된 후 벽지를 바르고 가구를 사들이며 집안을 예쁘게 꾸미는 데 열중하는 인물의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 지난 몇 주간 인테리어 검색에 골몰했던 내 마음이 딱 그거였다. 용도만 생각하면 십 분 만에 고르거나 아예 구입할 필요조차 없는 물건들을 오래도록 고르며 나는 기능이나 생활과 무관한 어떤 취향을 채워 넣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 취향이라는 말은 여유라는 말로도 번역해 쓸 수 있겠다. 내 주변의 공간을 돌보며 내 취향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도 있어야겠지만 마음의 여유가 꼭 필요하다.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이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더 이상 집을 꾸미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음식물이 튀어 엉망이 된 벽을 오랫동안 내버려 두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 벽지를 바르기 시작한다.


소설에서처럼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삶이란 참 자주 가팔라서 쉽사리 여유를 무너뜨린다. 그것도 꼭 예고도 없이. 그 생각을 하면 지난 몇 주간 글을 쓰지 못한 건 역시 바빠서는 아니었다. 여유로웠던 덕분이지.


참 감사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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