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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Dec 19. 2020

때로는 내가 가장 나를 모른다

나는 뭘 이렇게 많이 사 모았나

니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누가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늘어놓으면 얼굴은 웃고 있어도 속에서는 이런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또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있나. 


나는 지금까지 내가 검소한 미니멀리스트인 줄 알았다. 아기자기한 액세서리 가게나 가판대를 매번 지나치지 못할 때에도, 친구가 넌 귀걸이가 대체 몇 개냐고 물었을 때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만 원도 안 하는 귀걸이 몇 개 사 모으는 것 정도야, 뭐. 올해 들어 밖에 다닐 일이 흔치 않아지고부터는 더 이상 귀걸이도 사 모으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완벽한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는 확신이 차올랐다.


그러나 이번에 맘먹고 집안을 확 갈아엎으면서 나는 비로소 나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어느 시인께서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라고 하셨다지만 사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내가 사 모은 모든 짐더미였다. 언제나 구체는 추상을 압도하는 법이고, 여기저기 상자마다 꾹꾹 눌러 담아놓았던 나의 구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귀걸이만 사 모은 게 아니었다. 접어 보관하던 옷을 하나씩 옷걸이에 걸기 시작하자 그제야 어마어마한 옷의 양이 눈앞에 보였다. 노트와 메모지, 각종 스티커는 평생 써도 다 못 쓸 정도였고, 세우고 쌓아 겹겹이 보관해뒀던 책들을 꺼내고 보니  엄청난 무게에 책장 상판이 다 휘어져 있었다. 내가 읽은 책과 내가 한 말들에 따르면 난 분명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미니멀리스트여야 하는데, 아, 난 맥시멀리스트였구나, 그렇구나. 온갖 짐들로 수북하게 둘러 쌓인 방 안에서 나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장 당근마켓 앱을 깔았다. 몇 개는 팔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무료나눔으로 나눠줬다. 물론 버린 게 제일 많았다. 지구야, 미안해. 지금껏 지구를 위해 잘 한 일이라고는 배달음식을 시킬 때 일회용수저 빼달라고 한 일밖에 없는 것 같아 더 슬퍼졌다.


친구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전하자 깔깔 웃음이 되돌아왔다. 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맥시멀리스트라는 걸. 아직 채 정리하지 못한 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때로는 내가 가장 나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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