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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un 14. 2021

여름이 너무 빨리 밤공기 속에 내려앉은 날

이상한 용손 이야기 그리고 한국 괴물 백과

며칠째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나에게 불면증은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다. 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공기는 묵직하고 텁텁하여 아직 6월이라는 걸 믿을 수 없게 한다.


이렇게 무더운 밤을 반기는 이들이 있다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지금이야 다양한 플랫폼으로 내가 원하는 것만 골라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선택권이라 해봤자 공중파 채널 몇 개뿐이던 시절에는 일단 TV를 켜면 ‘더위=납량 특집’이라는 공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각양각색의 귀신들과 마주치곤 했는데, 겁이 많은 나는 그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TV를 꺼버렸다. 그나마 어딘가 분장에 어설픈 맛이 있는 ‘전설의 고향’이 내 담력으로 볼 수 있는 가장 극한의 공포물이었고, 흰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나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나 시커먼 저승사자들이 번갈아 가며 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렇게 ‘전설의 고향’을 보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세상 어느 한 편에는 그 속에 나오는 귀신들의 모습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궁금해 한 사람이 있었다. 뭐, 궁금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을 잃지 않고 조선 시대 기록을 뒤져 그 속의 기담들을 일종의 취미처럼 11년 간 정리해 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 괴물 백과>를 펴낸 곽재식 작가이다. 그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설화 속 저승사자는 사실 검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것과 한국에는 소복 입은 귀신(물론 이와 비슷한 형태의 봉두난발이라는 귀신도 있다)이나 구미호 이외에도 다양한 괴물 설화들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실 곽재식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좀 더 오래 전 일이다. 창비에서 꾸준히 펴내고 있는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중에는 곽재식 작가의 <이상한 용손 이야기>가 있다. 이 시리즈에는 정세랑, 김애란, 김초엽 등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이 많이 속해 있었는데도 다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이 작품이었다. 소설과의 첫 만남이라는 주제에 가장 부합한다고나 할까. 용의 능력을 아주 찔끔 이어받은 소년이 그 능력으로 모험을 떠나거나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니라 조용히 학교에 잘 다니다가 그만 첫사랑에 빠져 동네에 폭우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이야기는 동화와 소설 사이의 가장 풋풋하고 아름다운 경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곽재식이라는 이름은 낯설기만 해서 그냥 이런 작가도 있구나, 하고는 한 동안 잊고 지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지셔서 유퀴즈에까지 출연하신 작가님


그러다 우연히 들르게 된 종로의 한 작은 서점에서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 괴물 백과>였다. 이 책 옆에는 비슷한 기획 의도를 갖고 한국의 요괴들을 모아놓은 책이 하나 더 꽂혀 있었다. 심지어 표지는 그 책이 훨씬 더 그럴싸해 보였다. 그러나 원문에 없는 내용을 부풀리기보다는 해석에 집중하며 꼬박꼬박 출처를 밝혀 놓은 성실함과 단순하면서도 형태가 잘 살아 있는 삽화 때문에 <한국 괴물 백과>에 좀 더 마음이 끌렸다. 그렇게 이 책을 살까말까 고민하던 중에 작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곽재식, 어디서 들어봤더라. 불현듯 몇 달 전에 읽었던 <이상한 용손 이야기>가 떠올랐고, 나는 그렇게 곽재식이라는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새로운 독서 취향의 발견이란 낯선 세계와 조우하는 여행만큼이나 즐거운 일임을 이 땅의 수많은 책 애호가들을 아실 것이다.


지금도 <한국 괴물 백과>는 후덥지근한 밤공기와 함께 내 책상을 굳게 지켜 주고 있다. 여전히 ‘전설의 고향’보다 무서운 건 사절인 나에게 이 책은 충분히 등골을 서늘하게 해주는데, 또 한편으로는 설레게도 해준다. 이 책에는 옛 기록만 담겨 있는 게 아니라 여기 수록된 괴물들을 소재로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언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창작의 재료가 될 수 있을 방대한 기록 자료를 이만 원 정도밖에 안 하는 돈으로(심지어 그의 블로그에는 무료로 자료가 다 올라와 있다) 공유하는 것도 놀라운데, 상상력으로 먹고사는 작가가 그 상상력까지 이렇게 함께 배포해 주다니. 창작의 공유경제를 꿈꾸는 작가의 천진난만한 선량함이 자꾸만 마음을 설레게 한다.

   

덕분에 나에게도 언젠가 이 책에서 얻은 소재를 활용해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이런 소망을 입 밖에 내는 건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다. 일단 입 밖에 냈으면 언젠가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하기 때문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쓰는 일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전혀 다른 강도의 창작 노동일 것이 분명한데,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해낼 수 있을까.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 나를 위해 곽재식 작가는 그의 또 다른 책인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을 통해 이렇게 얘기해주고 있다. 대단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마라. 괜히 작가가 되겠다고 직업을 때려 치워서 마음의 부담을 스스로 지우지 마라. 그렇다. 남의 책에서 얻어 온 소재로 시작하게 된 소소하고 짤막한 이야기라도 좋고, 전업 작가가 아니라도 좋다. 낮에는 회사원으로 일하면서도 밤마다 ‘1곽재식 속도(SF소설계의 유행어로 평균적으로 6개월에 단편 4편을 쓰는 곽재식 작가의 창작 속도를 의미한다)’로 써나가는 작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나도 언젠가 빠르든 느리든 나만의 속도를 가질 수 있겠지. 그 속도로, 즐겁게, 모쪼록 즐겁게 써나가는 거다. 때로는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을 글쓰기로 보내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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