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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Nov 22. 2021

아름답지 않았던 나의 2000년대에게

2000년대 감성은 나도 좋아하지만

명명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시절, 나에게는 2000년대가 그러하였다.


그 시절 나는 십대 후반을 지나 갓 스물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나이를 청춘이라고 불렀다. 청춘이란 무릇 지나놓고 보면 그리운 것이므로 내게 2000년대의 기억은 항상 그립고 찬란했다. 처음 시작한 기숙사 생활, 고향 친구들과는 완전히 다른 말씨를 쓰는 사람들, 그리고 첫사랑. 세상은 온통 새 것이었고, 나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2000년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유튜브에서는 2000년대 노래를 모아놓은 플레이리스트 영상이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고, 그 시절 유행했던 것들에 MSG 양념을 얹어 다시 보여주는 <05학번이즈백> 같은 개그 영상도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는 걸 보면 지난 추억을 그리워하는 내 또래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이래서 어른들이 그러셨나보다.


너희도 나이 먹어봐라. 다 추억 먹고 사는 거지.


그렇다. 추억을 먹고 사는 일은 나이를 먹고서 보니 참 달콤했다. 우리의 뇌가 공들여 추억을 아름답게 보정해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늘 팍팍하고 내일도 달라질 것 없이 뻔하니 지나간 어제라도 아름다워야지. 그래서 나 역시 달콤한 2000년대의 추억 속에 잠기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D.P.>를 보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틀었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이틀 밤에 걸쳐 다 보고 말았다(하룻밤만에 다 보고 싶었지만 이제 그럴 체력은 없다). 그런데 재미있게 보고 난 뒤끝이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선임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모습으로 <D.P> 시즌1은 끝이 난다


뭐라도 해야지.


결연한 의지가 담긴 얼굴이었으면 차라리 덜 슬펐을까. 겨우 이십대 초반의 나이일텐데 벌써 영혼이 늙어 죽어버린 것처럼 텅 빈 얼굴로 내뱉는 그 대사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왜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 PTSD가 온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된 <오징어게임>은 19세 관람가, 반면 <D.P.>는 15세 관람가이다. 하지만 대놓고 화면에 피가 난무하는 <오징어게임> 속의 폭력과 살인보다 조금씩 잘근잘근 사람을 짓밟는 <D.P.> 속의 폭력이 더 오래도록 잔상에 남는 건 충분히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고, 실은 빈번히 일어났었던 폭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일상 속 폭력이 주는 공포는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살아왔던 나 같은 사람에게도 청춘이라는 단어 아래 묻어 두었던 모든 부정적 경험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2014년 일선 부대에서 있었던 부조리라고 보기에는 좀 심하다. 전반적인 느낌으로는 2000년대 중반 정도 일을 극화한 것 같다.


2014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를 보고 군 관계자가 얘기한 내용이란다(출처: 미디어 오늘 2021.9.13. 기사). 일단 2014년에 터졌던 굵직굵직한 군대 내 가혹행위 사건들을 선명히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저렇게 말하는 군 관계자는 대체 과거를 솔직히 돌아볼 능력이 얼마나 결여된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그런 사람조차도 2000년대 중반에는 저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걸 인정한다. 왜냐하면 2000년대는 정말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달콤한 추억 보정의 막을 걷고 바라본 그 시절에는 충분히 아프고 기이하며 폭력적이었던 기억들이 산재해 있다.


물론 ‘당신의’ 2000년대는 달랐을 수 있다. 나는 그저 ‘나의’ 2000년대를 말해 보려 한다. 여전히 그립고 눈부시게 찬란했지만 행복했느냐고 묻는다면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그 시절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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