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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Dec 29. 2021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날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누군가 작고 귀여운 핑크빛 아기돼지를 정성껏 기르면서 “이 돼지를 백일 후에 잡아먹을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소 복잡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몇 달 전 한 일본인 유튜버가 이런 콘셉트로 자신의 채널을 운영해 사람들의 입에 꽤 오르내렸었다. 기사를 통해 이를 알게 된 나는 이 유튜버의 이후 행보를 가늠해 나가며 혼자 짧은 소설을 구상해 보기도 했다.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는 소설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찾아 읽게 된 책이다. 사실 행위의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책의 내용은 그 일본 유튜버의 영상과 크게 다를 것 없다. 내 손으로 기른 돼지를 잡아먹는 것. 하지만 여기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자, 일단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작가는 채식주의자다. 돼지를 작고 지저분한 축사에 가둬 키우며 마취제도 없이 꼬리를 자르고 거세를 하는 축산계의 현실에 대해 그는 확고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가축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은 육식 자체를 죄악시한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죄책감은 대체로 반감을 불렀고, 현실을 더 외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육식에 대한 죄책감을 강요하는 대신 공장식 축산을 하지 않고도 돼지를 키우고 먹는 일에 도전한다. 이른바 자연양돈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돼지들은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에게 달려들기도 하고, 새로운 물건에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고, 땅을 파고 놀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싸우다 사이좋게 널브러져 쉬기도 한다. 그냥 마트에서 돈을 주고 간단히 사올 수 있는 식재료도 아니고, 인기 영상 속에 등장하는 귀엽고 애교 많은 반려동물도 아니다. 그냥 각각 제 삶의 욕구에 충실한 고유의 개체로 존재한다. 작가는 살아 있는 동안 이 돼지들이 최대한 돼지로서의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사부터 먹이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에게도 돼지를 잡아먹을 시간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잡아먹다’라는 동사를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지만 사실 현대사회에서 ‘잡는’ 일과 ‘먹는’ 일은 완벽히 분리되었다. 특히 돼지 같은 큰 동물을 잡는 일은 육체적으로도 중노동이며 정신적으로도 유쾌한 일이 아니기에 일반인의 눈길이 닿지 않는 도축장에서 별도로 행해진다. 하지만 작가는 돼지의 생명을 거두는 마지막 마무리까지 자신의 손으로 행한다. 잡는 행위가 생략되고 먹는 행위만 하게 될 때, 이 고기가 한 때 피가 흐르고 살아 움직이던 생명이었다는 생각과 그에 수반되는 책임감은 흐려질 수밖에 없으니까.


남이 죽인다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책임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목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남의 살을 먹는 일, 생명을 얻는 일은 쉽지 않다. 그동안 나는 너무 쉽게 살았다.


사실 일상생활 속에서 입 안에 한 점의 삼겹살을 집어넣을 때마다 살아 숨 쉬는 돼지를 연상해내는 일은 참 어렵다. 나 역시 한 때는 문제의식을 갖고 채식에 도전했으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 동안은 고기를 먹게 될 때마다 기도라도 꼭 올렸었다. 기도의 내용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대체로 네가 내어준 생명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네 생명의 값만큼 좀 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되어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다 차츰 그런 기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아도 고기는 맛있었고, 음식에까지 감사와 책임을 느끼기에 세상은 너무나 바쁘고 가볍게 돌아갔다.


애완용 미니돼지를 길러 잡아먹겠다던 일본 유튜버의 마지막 영상은 결국 맛있게 돼지고기를 먹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게 진짜 자기가 기르던 돼지의 고기인지 어디서 사온 고기인지는 알 길이 없고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다. 돌이켜보니 내가 정말 궁금하고 또 불편했던 지점은 결과가 아닌 그 결과로 가는 과정이었다. 이 유튜버를 옹호하는 댓글들을 보면 대부분 다음 사실을 논리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당신이 먹는 돼지고기도 어차피 누군가 기르고 잡은 돼지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제 손으로 기르지 않았을 뿐 누군가 길러낸 생명을 먹는다. 심지어 채식주의자도 식물의 생명을 취한다. 문제는 그 유튜브 영상 속에는 자신이 기른 생명을 거두어 음식으로 삼는 이가 느껴야 할 어떠한 책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책임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안함은, 그도 어렵다면 감사함이라도 느껴져야 할 텐데 그 영상에서 느껴지는 마음은 오직 재미, 딱 그것 하나였다.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 그 영상 속 유튜버의 마음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오래도록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불편하고자 한다. 그 불편함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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