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인천 공항에서 만난 우리들은 공금을 모아 유로화로 환전을 했다. 각자 짐도 부쳐서 손이 가벼워졌다. 다음 달에 만료되는 라운지 이용권을 네 장 가지고 있던 첫째 후배 덕분에 한 시간 남짓, 셋은 라운지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맛난 음식과 음료를 공짜로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외 출장은 대게 업무 외적인 일이다. 나도 그렇고 후배 둘도 그랬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 준비를 해야 하고 알아서 챙겨야 한다. 일요일 오전 출발인데 전전날 밤 열한 시 넘어 사무실에서 나왔다. 연일 야근으로 킥복싱을 하루도 못나갔다.도장은 또 일주일 못간다 쳐도 토요일 오후마다 뛰었던 마라톤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킥복싱을 같이 하는 동네 형님과 십 킬로미터를 뛰었다. 영어 발표자료를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만들고 참고할만한 시나리오도 썼다. 대략 출장 삼 주 전부터짬짬이 시간을 쪼개어 준비를 했다. 대내외 감사 수감과 연말 성과 준비 등으로 연중 가장 바쁜 시월에 모두들 용케 해냈다. 한 곳에서 일은 해도 처음 보는 후배들이라 어색할만했지만, 며칠 전 점심을 같이 먹었던 지라 금세 친해졌다.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스페인 마드리행 비행기가 떴다. 네다섯 시간이면 떨어지는 동남아 국가도 아니고, 꼼짝없이 열다섯 시간을 앉아 있어야 했다. 역시나 K-항공의 위엄. 이륙 후 한 시간도 안 돼 기내식이 나왔고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아까운 마음에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먹었으니 조용히 자라는 거였을까? 대낮이었음에도 승무원은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예닐 곱 시간 후 간식을 먹으면 또 불을 끄고. 홀로 불빛을 밝히며 좌석에 달린 스크린으로 영상을 보는 게 눈치가 보였다. 한편으론 며칠 비행기에 박혀 있으면 그렇게도 안 찌는 살이 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열다섯 시간이 지나 내린 스페인 마드리에서의 일정은 딱히 없었다. 아니 뭘 할만한 시간이 안 되었다. 밤 아홉 시 넘어 공항에 도착하면 택시를 잡아 타고 미리 정해놓은 여행자용 호텔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까지 다시 같은 공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와 막내 후배의 짐이 나오지 않았다. 삼십 분 넘게 뚫어져라 컨베이어 벨트를 쳐다봤지만 짐이 나오는 문은 닫히고 사람도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옆을 지나가는 보안 요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어디에서 왔고 종착지가 어디냐고 묻는다. 그러더니 첫째 후배의 짐 태그를 쓱 보더니 그런다.
"오늘 짐이 필요한가요? 내일 종착지로 가는 비행기에 실릴 거예요"
첫째 후배의 여행용 트렁크에 붙어 있는 태그를 보니, 인천에서 마드리드로 되어있다. 셋이 말을 맞춰보니 나와 막내 후배는 인천 공항에서 셀프 수속을 할 때 인천에서 탕헤르로 도착지를 했다. 하아. 안도의 한숨은 쉬었지만 하루 가까이 옷도 못 갈아입었는데 찝찝함부터 밀려왔다. 사시사철 자기 전에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입는 지라 걱정이 앞섰다. 여기는 해외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밖에. 다행히 여행자용 호텔 로비에 가니 생필품 자판기가 있어 칫솔만 사서 양치질과 샤워 후 입던 속옷을 다시 걸치고 잠을 청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대륙을 이동함에도 모로코 탕헤르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반이 넘지 않았다. 활주로에 들어서니 국제선 '꼬마' 비행기가 보였다. 기내에 오르자 머리가 천장에 달랑 말랑 한다. 말이 비행기지 KTX보다 좁은 공간이다. 캐리어를 갖고 타는 승객들이 유독 많다. 어제 나오지 않은 수하물이 잘 실렸을까 걱정이 스멀거린다. 한국에서 가져온 견과류 봉지를 뜯어 오물거린 지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활주로에 내려 난생처음 밟아본 아프리카의 공기를 들이켜고 있는데, 막내 후배가 외친다. "제 가방 저기 보이네요!" 나도 그 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같이 내려졌겠지 하면서.
후배가 짐을 잃어버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베리아 항공의 자회사인 Air Nostrum은 승객의 잦은 짐 분실로 유럽 내에서 악명이 높다고 한다.
음식 카트 하나 지나가기도 어려운 통로. 정말로 비행하는 동안 땅콩 한알도 안 줬다. 싼 게 비지떡!
다행히 둘의 캐리어는 나왔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이람. 이번엔 첫째 후배의 캐리어가 나오질 않는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분명히 접수 직원이 '깨지기 쉬움'(Fragile) 스티커도 두 개나 붙여주었고 들어가는 것까지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끝내 소식이 없다. 휴~ 여행용 가방이 잔뜩 쌓인 한쪽 공간에 눈길이 간다. 아마 오랫동안 주인을 못 찾은 가방들로 보였다. 바로 옆 사무실에 쭈빗거리며 들어갔더니 공항 입구 쪽 사무실로 가보라며 사무적으로 대한다. 그쪽으로 가니 여행객들 몇몇이 줄지어 서있다. 아마도 우리와 같은 처지인 듯싶다. 독일인 미국인도 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 겨우 우리 차례가 되었다.
"무슨 색이고 브랜드가 뭔가요? 현지에서 연락처를 적어주세요"...
뭐 이런 일이 흔한 듯 거침이 없이 인터뷰하듯 물어본다. 그러면서 짐이 도착하면 남겨 놓은 호텔 번호로 연락을 주겠다며 돌아가라고 한다.현지 항공사 홈페이지에도 접수를 해놓았다면서.
승객들이 다 빠져나간 탕헤르 공항을 유유히 걷는 냥이 가족. 짐을 못 찾아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찝찝함을 벗겨내지 못한 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짐을 못 찾은 첫째 후배가 그 사이 인터넷으로 알아본 모양이다. 이베리아 항공이 수하물 분실로 유럽에서 악명이 높은 곳이란다. 몇 주 지나서 찾는 경우도 있지만 영영 못 찾는 경우도 허다하다면서 그 사이에 한국 티켓팅을 해준 여행사까지 전화해서 하소연했으나 도와주지 못하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평상복 하나 입고 있는데 워크숍 때 입을 양복 말고도 케리어 안에 든 옷가지와 잡동사니, 인천 면세점에서 산 선물은 또 어쩔꼬. 내가 닥친 일은 아니지만 같은 배를 탄 우리였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일단 공항 사무실에 접수는 해놨고 항공사 홈페이지에도 분실 신고를 해줬으니 기다려보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호텔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고 호텔에서 밀주를 마신 저녁 밤까지 걱정이 흘러온 것이다.
당장 화요일부터 워크숍이 시작되었더라면 낭패였겠다. 다행히 우리들에겐 내일 하루의 시간이 더 있었다. 밀주를 마시고 온 뒤 시차 때문이었는데 마드리드에서부터 계속된 답답함과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나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북아프리카에서 처음 지어졌다는 상업용 극장
구도심 광장. 매일 밤 지나다녔는데 행사와 만남 때문인지 항상 북적였다.
대형 빌딩도 아파트도 없었지만 볼거리도 많고 걷기에 좋았던 구도심. 이게 바로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닐까
거리고 식당이고 저녁이 되면 불편할 정도로 어두웠다. 전력난 때문은 아닌 듯하고, 이유를 생각해 보니 음주 문화가 없고 현대식 건물이 많지 않아서일까 생각도 든다
현지 여행은 바로 이런 맛이지. 다음 날 우리 일행도 여기에서 양고기를 뜯었다.
탕헤르의 새벽은 아름다웠다. 한국에서는 아침 여섯 시 전에 일어났던 게 손꼽을 정도였지만 새벽 다섯 시도 안 돼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아 놓은 낡은 성벽 주위로 올라가 있는 건설 크레인, 대서양 멀리 동트기 전 희미하게 보이는 이베리아 반도는 몽롱했던 잠기운을 깨워주기에 충분했다. 이곳에서 아직도 네 밤을 더 잘 수 있다니. TV로 알자지라 방송을 틀어놓고 출력해 온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보며 큰 소리로 발표 연습을 했다. 크게 소리쳐도 막상 실제 현장에서는 긴장해서 목소리가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화면은 띄워놓되 청중과 교감하며 자연스럽게 발표하고픈 욕심도 있었다.
동트기 전 숙소 방에서 바라본 바깥 전경
이제야 알았다. 모로코, 아니 최소한 탕헤르는 고양이의 천국이라는 걸. 인도에서는 소를, 태국에서는 개를 신성시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고양이를 그렇게 대하는가 보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는데 어제 오후 닭고기 식당에서 봤던 녀석과 같은 색깔의 냥이가 의자 밑에 쪼그리고 있다. 호텔 문 앞도 아니고 여기까지 들어오려면 요놈들 시선으로는 산 넘고 물 건너 올 정도로 깊은 곳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거드는 호텔 종업원도 다른 투숙객들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포크에 달걀 조각을 찍어 이리 온~ 하고 동작을 취했더니 내 앞으로 온다. 우리 집 깜이가 그리워진다.
밥을 먹으면서 어제 짐을 못 찾은 첫째 후배가 뜻밖의 말을 한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공항에 가 봐야겠어요. 어젯밤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가만히 있으면 누가 나서서 알려주지 않는다네요, 그 사무실 다시 가서 한번 더 확인하고 혹시 모르니 비행기 떨어질 때 나오는지 보려고요, 어제 현지 유심도 심어놨으니 제 핸드폰 번호를 다시 알려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혼자 갈 떼니 우리 둘은 쉬거나 돌 곳이 있으면 돌라고 한다. 마음이 편치 않다. 워크숍 발표 준비나 자료 점검 외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후배 혼자 터덜거리고 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 소리냐며 같이 움직이자고 했다. 막내 후배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찾을 수나 있을까 기대는 안 했지만 짐을 잃어버린 후배의 답답함에는 격하게 공감을 했기에 겉으로 불안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오직 짐 찾는 거에 집중하자는 각오로 택시에 올랐다. 셋이 짐이 없으니 기사는 어제 냈던 택시비의 삼분의 이를 부른다.
짐을 잃어버린 마음만큼 하늘도 시무룩하다. 어쩌다 보니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모로코 편이 될 줄이야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했던가? 우연찮게 남자 셋이서 로드 무비를 찍게 될 줄이야. 그런데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고 했다. 급작스런 화요일 아침의 공항행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