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陳狀 일의 사정이나 상황을 말함.)
진상(陳狀 일의 사정이나 상황을 말함.)
캐디로서 가장 힘든 진상을 꼽으라면...
나는 바로 진행이라고 말하겠다.
모든 골프장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골프장이
진행에 대한 큰 스트레스가 있다.
(좋은 회원제 골프장은 그런 것 없이
여유 넘치는 곳도 몇 곳 있다곤 한다.)
진행이 무엇인가 하면
평범한 대중제를 예로 들어
7분에 한 팀씩 촘촘한 티 타임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예약하게 만들고
그 시간이 되면 골프를 시작하게 되는 거다.
8시 첫 팀이라면
8:07분 두 번째 팀
8:14분 세 번째 팀
8:21분 네 번째 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진행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만약 첫 팀이라 치고
1번 홀에서 공을 치고 100m 앞까지 나갔다.
두 번째 팀이 공을 쳐야 하는 시간이
8시 7분이지만
앞팀인 내가 계속 100m 앞에서 알짱거린다면
앞팀과의 간격이 위험하므로 뒤팀들은
공을 쳐선 안된다.
시간은 흘러가고 그렇게 티타임에
딜레이가 생기게 된다.
진행이 막혔다.
우리나라 골프장은 최대한 촘촘하게
팀들을 가득 받아두는 곳인지라
그 속에서 한 팀이라도 느려지면
나비효과가 발생하며 뒤팀으로 갈수록
지독하게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골프를 치러 오는 골퍼들에게도
빠른 진행은 큰 스트레스겠지만
일하는 캐디들의 입장은
사실 그 무엇보다도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게
진행에 대한 압박이다.
나는 현재,
꽤나 좋다는 회원제 골프장에서 일하는 캐디다.
골프장은 회원제와 대중제가 있는데
간단하게 말한다면
기본적으로 회원제는 코스와 서비스 같은 것들이
조금 더 관리가 되어있고
회원으로 등록된 사람들만 예약가능하게 갈 수 있는,
흔히 비싸고 좋은 골프장이 될 것이다.
대중제는 약간 저렴한 가격에
조금은 관리가 덜 된 골프장들이 많고
누구나 티 타임만 비어 있다면 부킹이 가능한 골프장이라 여겨도 될 것 같다.
하지만...
회원제고 대중제가 무슨 상관이랴
조명시설이 없는 골프장이라면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가을엔 미친 듯이 진행을 뽑아줘야 하는데...
가을 단풍을 보려고 열심히 부킹 한 분들이
단풍의 여유 따윈 즐길 수 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대놓고 얘기 못하는 내 성격에
무언의 눈빛과 몸짓으로
빨리 가자 재촉하는 나 자신도 민망할 지경에 이른다.
캐디라면 1번 홀에서부터
오늘 늦겠다, 빠르겠다 각이 딱 잡힌다.
지금까지 내 15년의 경력으로 봤을 때
골퍼들이 공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들의 움직이는 속도, 행동 등 몇 가지만 봐도
계산이 나오는 문제다.
모든 사람들의 성향과 성격은 다르다.
거기서 비롯되어 행동이 나오고 취향이 결정된다.
어떤 가방을 들었는지, 무슨 골프채를 사용하는지,
취향과 행동을 보면 성격이 보이고 성향이 나타난다.
성격이 느긋하신 분은 이동과 행동도 느긋하고,
신중하신 분은 샷 하기 전
복잡한 머릿속 생각으로 인해
긴 루틴을 가지고 계신 분이 많다.
호탕하게 웃으며 거침없이 샷을 하는 분도 있고,
말하기 좋아하시는 분은
샷 할 차례가 되어도 수다에 푹 빠져서 플레이가 지연된다.
심지어 다른 분 샷 해야 할 때
옆에서 계속 떠들어 진행에 더욱 방해가 되기도 한다.
볼을 잘 못 친다고 진행이 무조건 느린 건 아니다.
그래서 공을 못 친다고 캐디들이 그분들을
다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초보-비기너-분들은 힘들긴 하지.)
플레이 시 조금만 더 미리 준비하고
빠른 걸음으로 공 앞에 걸어가고,
공이 아예 O.B구역으로 완전히 나간 것 같을 때는
쿨하게 포기해 주실 줄 아시는 팀들은
잘 치든 못 치든 상관없이 빠르다.
좋은 스코어,
프로만큼이나 잘 치는 팀이지만
느린 팀들도 분명히 있다.
이런 팀을 만나고 진행이 느려지면 내 속은 더더
시커멓게 타 들어간다
앞에 홀이 비었어도
"우리가 못 치는 것도 아닌데 왜 느려?"
이런 소리나 하며 서둘러 줄 생각 따윈 전혀 없으니 말이다.
세상 느긋하게 모든 홀을 걸어 다니고,
숲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볼에 집착하고,
동반자 보다 빠르게 준비되었으면 기다리기보단
먼저 쳐줄 만 한데
너무나도 원구선타(홀에서 먼 쪽이 먼저 플레이하는 것)를 철저히 지키거나 하면..
죄송한 말이지만 우리나라 골프장의 실정과 맞지 않으신 것 같다.
특히...
안 그래도 진행이 느린데
긴 루틴을 가지고 계신 분이
멀리건(첫 골프샷이 잘못되었을 때 벌타 없이 주어지는 샷 기회)을 달라고 하면
나의 입장에선 난감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그분이 초구에 집착까지 하기
시작하면 내 등골은 서늘해진다.
어느 회원님이 계신다.
정말 공을 못 치시지만 매너가 너무 좋아
캐디들 사이에서 유명하신 분이다.
처음 그 회원님을 뵙던 날.
드라이버를 치셨지만 역시나 공은 또 O.B구역으로 사라졌다.
"회원님, 하나 더 치시고 가세요."
골퍼의 심정을 이해하는 나는
진행에 큰 방해가 안된다면 먼저 멀리건을 권한다.
하지만 회원님은 거절하시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아는 형님께 골프를 배웠는데 형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내가 멀리건을 하나 더 치려고 욕심부리면 나 말고 동반자 3명이 바빠진다."
본인의 욕심에 따른 변칙 플레이에,
급해진 진행으로 인해
함께하는 동반자들의 플레이도 바빠지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 회원님은 한 번도 멀리건을 치지 않으신다.
어차피 골프라는 스포츠엔
페널티 없는 '다시'라는 건 없다.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경기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골퍼분들 중 재촉하는 이유를 가지고
캐디가 일찍 퇴근하고 싶어서 진행을 쪼아대면서 보챈다고 말하는 분도 간혹 계신다.
그건 우리 캐디들의 입장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
귀에 꽂은 무전기에
모든 캐디들이 들을 수 있는 전체 채널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진행실 직원의 목소리가 울리게 되면
내 손은 오그라든다.
'오늘은 제발 내 이름 좀 불리지 말자.'
다짐을 해 보지만 그게 꼭 나 혼자 잘한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기에
나는 늘 일을 시작하기 전 숨을 몰아쉰다.
나는 캐디이면서도 가끔이라도 짬을 내서
골프를 치는 골퍼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일할 때도
골퍼의 마음을 이해하고 멀리건도 주고 싶고,
함께 라운딩 하는 동반자로서 그분들이 더 좋은 스코어를 내고 기분 좋게 마무리했으면
하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다.
다른 캐디분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고객님들이 기분 좋게 가야
캐디도 기분 좋은 건 다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진행이 느려지는 순간,
그 누구도 행복한 라운딩을 할 수 없게 된다.
캐디인 나조차 여유가 없어지고, 얼굴이 굳어간다.
급해진 고객들의 볼이 안 맞기 시작하며,
뒤에서 감시하는 마샬(경기진행을 돕는 요원)이 있기에 멀리건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된다.
오해하지 마시라.
안 주고 싶어서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주는 것이니.
골프는 스포츠다.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은 필드에서
격하지 않기에 잊고 있지만,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곳에서 피 튀기는 신경전이 발생되는 골프.
골프도 스포츠다.
그저 잔디 위를 걷고 싶다면 공원으로 산책을 가는 건 어떨까?
동반자와 수다를 떨고 싶다면 카페에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운동하러 나오신 거라면 건강을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주고
자신의 볼을 집중해서 쳐주시는 건 어떨까.
라는 말씀도 드려보고 싶다.
사실 진행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캐디만의, 혹은 고객만의 문제가 절대 아닌,
애초에
'한국 골프장의 시스템 문제'
결코 싸지 않은 그린피를 받으면서도
빡빡한 타임테이블로 팀을 가득 채워 넣고
고객들에겐 오롯이 스포츠를 즐길 시간조차 주지 않는
빠른 진행을 요구하는 골프장들이 가장 큰 문제 아닐까.
플레이어나 캐디에게만 빠른 진행을 요구하는 골프장들.
그곳에서 일하는 나 역시 스트레스로 힘들다.
캐디들은 골퍼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고
그들도 그런 우리 캐디들의
사정도 있구나 하고 조금은 알아줬으면 이라고
바라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