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를 배웠다.
캐디라는 직업 특성상 남편보다 내가 먼저 골프를 시작했다.
그(남편)가 정규홀에서의 2번째 라운드 날이었다.
캐디 와이프를 둔 그의 입장에선, 실제 필드에 나가보기도 전에 골프장의 진상골퍼라는 타이틀을 피하기 위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골프매너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2번째 라운드를 시작했다.
그날의 동반자는 나와 함께 근무하는 캐디언니 한 명과 그 언니의 지인(남자)동생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인생 최악의 캐디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오늘의 팀에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비기너가 한 명 있다곤 하지만, 현직 캐디가 2명이나 있는 팀에서 우린 최대한으로 오늘 함께할 캐디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항상 그런 상태고, 나는 거리도 잘 물어보지 않고 혼자 플레이하는 편이다.)
라운드 시작 전부터 캐디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기에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나 역시 내 기분이 고스란히 고객들에게 전달될 때가 있을 것이니까. 시작 전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 했다.
일단 캐디들은 남, 여가 섞여 있는 혼성 팀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 우리가 그런 팀이었으니 말이다.
-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티박스를 2개 써야 하는 것부터 시작. 여러 가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오늘 힘들어질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다음 기회에 이런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해보고 싶다.)
하지만... 라운드가 시작되자 내 기분은 점점 더 나빠오기 시작했다.
카트가 정차하면 핸드폰을 보기 바쁜 캐디 덕분에 남편과 동반자가 친 공을 봐야 하는 건 나와 동료 언니의 몫이었다.
캐디는 카트 옆에 가만히 선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카트 붙박이가 되어서 입만 움직이고 있는 캐디. 카트 뒤에 올려둔 골프백 옆에 가만히 서서 소리만 크게 외치고 있다.
경악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초보인 남편이 멀리 있는 자신의 공으로 달려가 공을 치려 하는데 깃대 방향이 아닌 완전 오른쪽 다른 곳을 보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초보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 모습을 본 캐디가 카트를 운전하며 고개만 슬쩍 내밀곤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왼쪽! 왼쪽으로 서야 되는데! 왼쪽, 왼쪽! 더더!!"
반말조의 말투는 당황스러웠지만, 방향을 알려주는 거라 도움을 준다고 여길수 있다.
하지만 귀찮아 하는 듯한 캐디의 무례함이 담긴 태도가 나를 황당하고 어이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라고 근무 안해봤겠는가. 잘 못 알아들으시면 딱딱 잘라 말씀드리느라 끝까지 존대를 못하는 상황도 으례 있는 것을. 하지만 지금 캐디의 황당무계한 언사는 다르다 느꼈다. 고객의 공을 추적하는 대신 핸드폰 액정을 쫓는 눈동자에는 프로 의식 대신 권태만 가득했다.
다행히 남편은 쌩초보,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달래기 바빳기에 주변환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기분 나빠할 것도 없었다.
'그래 기분 상하는건 나 하나면 되지.'
진행병이 있는 두 명의 여자손님(캐디) 덕분에 그날의 캐디는 조금 기분이 괜찮아졌는지 중간중간 우리 대화에 끼어들며 말로만 대충 떠들고 돈 벌어가는 캐디가 되었다.
끝날 때 까지도 여전히 일하는 모습은 일절 보여주지 않았다.
-열심히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캐디는 심각한 문제다.-
9H이 종료했을 때 마주치며 지나가던 다른 캐디가 우리 팀의 캐디를 보며 "아픈 건 괜찮아" 라며 물어볼 때에도 내 언짢아진 마음은 사실조차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플 때 일하러 나온 건 조금 신경 쓰이지만 저따위로 일 할 만큼 아프면 일하러 나오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지...'
저 캐디가 아픈데 근무하러 나온 상황에 왜 고객인 내가 피해를 봐야 하는 것일까.
특히나 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많이 아파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우리끼리 하는 말에는 일일이 끼어들어 웃으며 말하는 걸 봐선 어디가 아픈 건지 전혀 알기 힘들었다.
그렇게 그날의 캐디는 라운드 종일 핸드폰을 보며 메신저를 보냈고, 카트에 서서 우리에게 거의 반말인 듯하게 소리를 질렀다.
공을 봐주는 일도 없어 내 공이 어디 있냐 물으면 얼버무리기 바빴다.
기분이 상한 채 라운드가 종료했다.
캐디의 마음은 캐디가 알 것인데, 괘씸한 마음이 더 들었던 나는 그날의 캐디가 아프든 말든 전혀 헤아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완 다르게 어딘가 또 아프다면서도 "오죽하면 저리 나와서 일할까"라는 측은지심을 느낀 동반자 언니가 팁(캐디 사이에선 오버피라고 부른다.)을 조금 더 주는 상황이 발생했고, 골프장측에 컴플레인을 걸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 골프장을 떠났다.
캐디 입장에선 고객에게 걸리는 컴플레인이 가장 큰 잘못을 했을 때 받는 벌점을 받는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차마 그것 까진 말하지 못하고 프런트를 지나쳤다.
아파서 힘들었다면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고객들을 놔두고 하루 종일 메신저로 시시콜콜하게 대화만 하는 걸 본 상황에선, 그냥 일을 안 하는 캐디라고 밖에는 느낄 수 없었다.
심각하게 캐디피가 아까운 상황이고 화가나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 전날 방문했던 골프장 캐디에 대해서 얘기하던 중이었다.
마침 그 자리엔 어제의 골프장에서 근무해 봤기에 상황을 알고 있는 캐디언니가 있었다.
내가 겪은 진상캐디에 대해서 얘기하던 중 컴플레인을 걸지 않고 온 것에 대해 얘기하자 그 언니가 말했다.
"그 골프장 컴플레인 걸어봤자 소용없을걸. 팀이 많아지면서 캐디가 채용이 안되다 보니 캐디 수가 많이 부족해. 아픈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일을 내보낸데. 그렇다보니 컴플레인 들어와도 회사 측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캐디들도 대충 그렇게 일하게 됐다고 하더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캐디가 구해지지 않자 지금 남아있는 캐디들로 휴무나 병가도 제대로 주지 않고 간신히 돌아가는 상황들인 것 같았다.
어제 만난 캐디처럼 본인의 일조차 하지 않는 게 보이고 핸드폰이나 들여다보며 메신저나 보내는 캐디의 행실도 문제지만, 그런 상황을 방치하고 이대로 팀이나 많이 받고 어떻게는 돌아가기만 하길 바라는 골프장도 큰 문제거리일 것이다.
즐거운 플레이를 위해 비싼 요금을 지불하고 방문한 고객이 그 피해를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골프장에서 일하는 내 입장에서도 이걸 편 들어줄 수 있는 문제인가는 많이 다르다고 느낀다.
누구든 문제인 것 같고, 누구의 문제가 더 큰 것인가는 나 혼자 정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이건 골프장들의 시스템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캐디의 입장에 대한 것도 있는 것 같다.
"개인의 직업윤리와 조직의 시스템 부재가 만났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정말 둔하지 않은 이상 사람들은 느낀다.
긍정적인 에너지, 부정적인 에너지 그 사람이 뿜어내는 분위기를 알게 된다.
특히 여성들이 그런 기류를 더 예민하게 눈치챈다.
그리고 나를 뒤 돌아봤다.
내가 일했던 모습들을 떠 올려봤다.
나만해도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내 기분에 따라 표정과 말투에 드러났던 적이 꽤나 있었을 텐데.
내가 웃으며 호의적으로 대했을 때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더라. 반대로 친절한 척해도 진심이 담기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들도 귀신같이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곤 나에게 똑같이 대한다.
서비스직을 시작한 지 15년,
나이가 들어가고 살아가면서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인 것 같다.
이 사자성어만 떠올려 보고 실천한다면
서로에게 실수하며
일명 "진상"으로 찍히는 일은 없지 않을까.
진상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골퍼일 때 느낀 '돈 아깝다'는 마음을 기억한다면,
나와 함께 라운딩 하는 고객들에게 저런 마음을 심어주는 캐디가 아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캐디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은 마음 따윈 없다.
그저
'오늘 하루 저 캐디와도 즐거웠어' 정도라면 좋을 것 같다.
거창한 이타심이 아닌 나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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