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 편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근무하는 회원제 골프장에서 일하다 보면 종종 회원님들과 함께 내장하신 고객님들께서 캐디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 골프장은 회원만 특별대우 해주잖아."
"회원 것만 라이 잘 봐주지 말고 우리도 잘 부탁해!"
"내기하면 회원님만 응원하지 말고 우리도 응원해 줘."
초반 근무시절엔 저런 말들을 듣곤 민망하게 웃으며 "그럴 리가요. 저는 이 팀의 캐디라 공평합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회원님의 표정은 굳어 갔다.
조금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은
"죄송하지만, 그래도 저는 회원님 편이고 저희 회원님 응원할 거예요!"
라는 빈말의 처세술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많이 미흡했던 것이다.
불과 2년 정도 전의 어느 날 일이다.
남자회원님 한분과 세분의 남자 고객님이 내장하신 날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날의 라운드는 별 이상 없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60대가 다 되어가는 연배로 보이시는 매너도 꽤 좋으신 분들과 함께 즐겁게, 힘들게 하시는 분 없이 웃으며 하는 라운드 중이었다.
15번 홀까지는 말이다.
내기를 하던 중 전홀에서 비겼기 때문에 판돈이 두 배가 된 '배판'이 됐을 때, 지금까지는 거의 못 이겨 돈을 잘 못 먹고 있던 회원님이 15번 홀의 내기돈을 먹게 된 상황이었다.
두배로 돈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냥 판돈만 챙겨가시는 회원님을 보곤, 16번의 티 박스 앞에서 카트를 정차하며 운전석에 앉은 채 넌지시 말을 던졌다.
"어? 근데 회원님 배판이었어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묵직한 손바닥이 내 왼쪽의 어깻죽지에
"퍽!"
하고 매질을 당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충격이 서서히 몰려왔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겠다는 정신이 퍼뜩 들어 누군가 서있는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키 크고 덩치 좋은 A고객이 서 있었다. 화가 많이 났는지 아랫입술을 윗니로 꾹 깨문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채.
그 누가 봐도 정황상 그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캐디 주제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배판이든 아니든 알아서 챙겨가는 거지"
그 손님의 말투는 주변의 누구라도 듣을세라 조용하고 낮았다. 내 가까이에 붙어선 채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렸다는 "탓"을 하면서 있는 그.
지금까지 저 A고객이 진상이었다면 스스로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었을 것이고 의외성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기에 충격이 더 컸다. A는 강한 남성성은 보였지만 오히려 여러 면에서 쿨하고 위트 있는 분이라 인식하고 있었기에 여러모로 날 당황시켰다.
-하아-하고 눈을 내리 깔았다. 내 어깨가 축 늘어졌다. 황당함에 달리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상하는 기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맞아본 건 또 처음이네.'
서러움에 눈물이 돌 것 같으면서도 울고 싶지도 않았다. 씁쓸함에 이빨을 꾹 깨물었다.
주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동반자들이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했는지 급하게 무마시키기 시작했다.
"캐디님 미안해요. 저 친구가 승부욕이 좀 있어서..."
"야!! 너 빨리 사과해. 이건 네가 잘못했어."
나보다도 10살 이상의 연배 있으신 분들이 친구 한 명 잘못 사귀어 허둥지둥거리시며 대신 사과하시는 모습을 보아봤자 전혀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들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한 위로나 말들이 아니란 게 너무 버젓이 보였다. 자신의 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그저 조용하고 무탈하게 넘기고 싶어 하는 그들의 마음
'저분들은 죄가 없다. 오늘 라운드에서 친구 한 명 잘못 데리고 오신 실수밖에 없으시지.'
애써 좋게 생각해 주려 노력했다.
회원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계셨다. 아니, 이 상황에서 피해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자주 뵀던 분도, 자주 내장하시는 회원분도 아니셨기에 그분의 성격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약간 우유부단하고 주도적이지는 못한 분이셨던 것 같았다. 누구도 내 편은 없었다. 폭력 앞에서도 말이다.
나를 때려던 분은 사과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했다.
"때린 건 미안하지만, 쓸데없는 참견은 언니가 안 했어야 맞지."
A의 생각은 끝까지, 고작 내기돈에 걸린 게 배판이라는 말을 해준 내 잘못이라는 말이었다.
15번 홀의 판돈은 2만 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캐디를 하며 그날의 팀 분위기에 따라, 할 말 안 할 말 최대한 가려했기에 15년 이상 일하는 동안 컴플레인 걸린 적이 없다고 꽤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날의 팀 분위기 역시 그런 말은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분들의 내기 룰이었지만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알려드리는 것도 괜찮을 거라 봤다.
A가 보기엔 내가 회원만 챙기는 나쁜 캐디였을까? 정말 저 정도 참견도 그렇게 기분이 나쁜 일이었을까?
그전까진 그 분과 재미있게 웃으며 대화도 했기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의 옹졸함을 몰라본 나의 눈썰미 부족이 문제였을까?
그 팀과 헤어지기 전 남은 홀은 고작 3홀.
주변 분들의 대충 사과와 대충 넘어가고 싶어 하는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며 남은 3홀을 돌게 됐다.
도저히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3홀을 돌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쓸데없는) 나의 책임감 때문에 다른 분들께는 민폐 끼치지 않아야지 하곤, 떨리는 목소리로 굿샷을 외치고 거리를 불러드렸다.
물론 그 A 역시 약간은 눈치를 보시는 듯했지만, 다른 분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동반자를 위해 나를 달래려 애썼다.
약간의 돈까지 내밀며 어떻게든 큰일로 번지지 않기를 바라시는 게 보였다.
'이딴 돈 필요 없어요!'
던져버리곤, 저분이 나를 때렸다고 말하며 체인을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수십 번.
나는 또 그렇게 남은 세분의 면을 봐서, 또는 3홀을 남겨두고 다른 캐디와 바꾸고 설명하는 시간 걸리는 일도 싫었기에 이래저래 내 기분만 울적하게 라운드를 끝마쳤다.
결코 좋은 헤어짐의 인사는 드리지 않은 채, 손님들이 들어간 뒤 한적한 곳에 카트를 끌고 가서 받아 든 돈을 꼬깃하게 움켜쥐곤 멍하게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동료들이 무슨 일이 있냐 물었지만 고개만 가로저었다.
서럽고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아무 말도 못 한 나 자신에 대해 또다시 자책감만 남았다.
이 나이 먹어 맞고 다닌다는 나 자신이 세상 그렇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참고 있었는지 왜 참고 살 생각을 하는지 왜 바로 소리치고 왜 때렸냐,
그깟게 그렇게 중요했느냐,
천기누설이라도 되냐고 소리라도 질렀다면 지금도 이렇게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가 지지 않을 텐데...
바보같이 할 말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서비스직이라는 틀에 박혀 참고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게 가끔 한심하지만... 그렇게 나는 또 배워나가는 중인 것 같다.
하지만 나를 때렸던 A고객은 좀 더 마음의 수양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주변의 다른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아니면 서비스직이며 본인보단 어린 나에게만 함부로 하시는 걸까. 겉으로는 대범한 척. 진심은 돈 몇 만 원에 본성인 쪼잔함을 보여주셨던 분.
나이만 먹는다고 인성이 저절로 쌓이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2만 원짜리 판돈 뒤에 숨겨진 자신의 옹졸함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