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자연을 동경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여태 살았으니 도시의 삶이 익숙하고, 그것에 딱히 부족함이 없다. 가끔, 삭막하다, 같은 희미한 감정을 느끼지만, 일부러 잔디밭을 찾아다닐 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푸른색을 보면 마음이 좋고, 무의식 중에도 그런 것을 좋아하지만, 선뜻 꽃집에 가서 반려식물이라며 사들고 와 물을 주고 가꾸며 기르는 일은 잘 되지 않는다.
전원이라든지 귀농이라든지 하는 것 또한 부럽지 않고, 궁금하지도 않다. 어쩌면 그것은 어릴 때의 몇 가지 기억, 즉 더러움과 불편함, 강하게 남은 퇴비 냄새나 할머니 집의 쿰쿰함과 곰팡이 같은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나는 나이 든 사람들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골의 삶, 혹은 전원생활 같은 것이 늘 촌스러웠다. 말 그대로, 늙은이들이나 하는 짓 같았다.
돈 좀 있고, 그것으로 여생을 마감하는, 죽을 날짜만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세상에 재밌는 것이 많은데,
지금도 그런 생각은 같다.
즉 자연을 좋아하지만, 지금 내 삶이 자연에 더 가까워지는 것에는 일종의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도시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늘 외롭고, 너무 많은 물질에 둘러쌓여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서로 이어지거나 섞이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런 것 중에 하나처럼 홀로 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고.
어쩌면 그렇게 도시의 삶에 익숙해서 다른 것을 두려워 하는 건 아닐까.
지나치게 디자인된 삶. 숨 막히는 답답함. 모든 것이 격자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 같은, 프로그램적인 삶.
그 너머의 것, 야생에 대한 갈증이 얼마 전에 딱 한 번 아주 경렬히 일어났다. 그전까지 나는 그런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TV나 영화에서 야생 다큐멘터리 따위를 볼 때도 불편함에 가까운 무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이 책, <야생 속으로>를 몇 장 넘겨보다 곧장 깨달았다. 어떤 낯선 가능성을.
서점에서 이 책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고, 아무 거부감 없이, 펼쳐 읽으며 조금씩 빠져들었다. 책을 읽지 못한지 꽤 오래 되었다. 재미가 없었으니까. 어떤 이야기도 말도 주의가 가지 않았다. 지겨운 것들. 어째서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전부 도시에 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 청년, 크리스 맥캔들리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어리석은 신념. 그것이 굉장히 매력 있다. 바보 같은 신념으로 야생 속으로 걸어가 죽는다. 비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활활 타는 불로 날아드는 나방처럼, 멍청하게 아름다운 순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안전지대 위에서 위험한 것들을 바라보는 짓일 뿐이지만, 출구가 없다고 오랫동안 느껴온 내게는 적어도 작은 숨구멍 같은 것이었다.
크리스의 여정을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내 삶에 빠진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야생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