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에세이] 내 커리어 장르는 블랙코미디 - 5

#5 진정한 외국인 검은 머리 외국인

by 직딩누아르

진정한 외국인은 검은 머리 외국인


애플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미국드라마〈파친코〉는 고국을 떠나 억척스럽게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한인 이민 가족의 삶과 꿈을 그려냈다. 주인공 순자(윤여정)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녀의 손자 솔로몬(진하)은 한국계 일본인으로서 미국 은행에서 일하는 뱅커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좇지만, 매번 직전에서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부딪히고 만다.


문학적으로는 그들의 치열함과 고군분투가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현실에서 그런 이들을 직장 동료로 만나 함께 일한다면 어떨까?


물론 그들의 배경과 애환에는 존중과 공감이 깃들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벅차고, 실제로 함께 근무하기에 꽤 힘들었던 경험도 했다. 그래도 회사 안에서 만난 검은 머리 외국인들은 현실 버전 파친코라기보단 블랙코미디였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뿐,〈파친코〉속 이민 2세의 삶을 희화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며, 특정 집단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음을 밝힌다.)


내가 만났던 이민 2세, 이중국적자들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터라는 전쟁터에서 본인을 잘 방어하고 지켜냈다. 이중 국적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들며 불리할 때는 유리한 국적과 문화적 시스템을 선택하며 상황을 이리저리 피해나가는 데 선수였다.


특히 한국의 산업과 문화를 하대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본인들과 선을 그어버리고 되려 선진문화권 속에 속한 듯 콧대와 목을 빳빳하게 치켜세울 때, 때론 그들의 뻔뻔스러움과 여유스러움이 어쩔 때 부럽기도 했다. 그저 내겐 한국어 하는 머리 검은 외국인 느낌이었다.


유럽 유명 제조업 출신의, 소위 ‘검은 머리 외국인’이 이사 직급으로 들어왔다.

MBA에 회계사 자격증까지 곁들인 화려한 이력은 충분히 눈길을 끌었다. 글로벌 기업의 최고 자리를 역임하고 조기 퇴임한 그는, 로펌 외국인 변호사의 추천을 받아 대표가 직접 모셔온 귀한 몸이었다. 대표가 손수 나섰다니,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나 싶어 우리 모두 은근히 기대했다. 무너져가던 회계 체계를 바로잡고, 광야 같은 이 땅에 글로벌 시스템을 심어줄 구원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첫인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사석에서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마치 미드 속에서 튀어나온 유머러스한 외국인 임원 같았다. 그는 외국인 직원들에게는 항상 영어로 대화를 했고, 국내 직원들에게는 한국어로 대화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진짜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오전 11시부터 직원들에게 점심 메뉴를 묻곤 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국 매번 본인이 원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법인카드를 “적법하게” 사용하기 위한 의식 같은 것이었다.

가끔은 내게 “주변에 소개해줄 여자 없냐”며 농담 반 진담 반을 건네기도 했다. 나이 지긋한 분의 농담이라며 웃어넘겼지만, 그의 몇 가닥 남은 블루블랙 머리카락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해졌다.


티타임에는 직원들에게 질문 폭탄을 퍼붓다가, 정작 본인에게 질문이 돌아오면 묵묵부답이었다. 세법 관련 문의를 드렸을 때 들은 답변은 압권이었다.

“나는 국제 세법은 잘 알지만, 한국 세법은 잘 몰라요. 그러니 여기는 앞으로 하청업체를 쓰는 게 어떨까요?”


재무 이사라는 직함이 무색한 순간이었다.


그나마 회사가 간절히 원했던 건 외부 감사에서 반복 지적된 재무 건전성과 투명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퇴사 무렵 밝혀진 건, 수백만 원짜리 고급 식사와 샴페인, 코냑 구입 내역뿐이었다. 중요 정치인사와의 자리라 했지만, 왜 재무이사가 밤늦게 호텔에서 정치인을 접대해야 했을까? 일반 직원들은 5천 원짜리 전구 하나 사려 해도 기안서에 결재 줄을 타야 했는데 말이다.


결국 대표와 욕설이 난무한 통화 끝에 그는 쫓겨나듯 회사를 떠났다.


떠나기 전 내 책상 위에 두툼한 회계 장부와 이메일 출력물을 올려놓고 남긴 메모는 더 가관이었다.

“회계감사가 다음 주예요. 앞으로 회계 감사는 그대가 맡으면 좋겠어요.”


....... 나는 마케팅 팀장인데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직딩에세이] 내 커리어 장르는 블랙코미디 -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