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에세이] 내 커리어장르는 블랙코미디 - 12

#12 선진 경영이라는 이름의 신기루

by 직딩누아르

인터뷰 속의 한국, 현실 속의 한국


외국 경영진들은 인터뷰에서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한국은 세제 혜택이 좋고, 노동력이 우수하며, 인프라 역시 훌륭해 사업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듣고 있으면 한국은 마치 글로벌 기업을 위해 준비된 완벽한 무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 국내 노동법이나 노동 환경에 대해 조금만 더 물어보면 표정이 이내 굳는다.

무엇보다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고용주보다 노동자 보호를 강조하는 법 체계와 노조, 쟁의, 파업과 같은 단체행동 같은 것들이다.


중대재해법 역시 달갑지 않은 존재다.

인력 구조조정이 상대적으로 유연한 서방 기업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노동법과 기업 규제, 윤리적 책임, 그리고 제조업 기반의 강한 노조 문화는 되도록 멀리 두고 싶은 요소로 여겨지는 듯하다. 심지어 매년 근속할 때마다 발생되는 퇴직충당금, 퇴직금도 왜 줘야하냐며 못마땅해한다.


그들이 말하는 선진 경영 철학, 존중, 책임, 의무 같은 단어들은 때로는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민주주의가 주는 혜택은 달콤하게 받아들이지만, 그에 따르는 의무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본국에서 동일한 사업을 운영한다면 한국보다 높은 법적 기준은 훨씬 더 높고, 엄격하며, 인건비와 고정비 부담 역시 몇 배로 커진다.

안전사고나 사회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기업이 폐쇄되거나 고용주가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야할 만큼, 기업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법적 책임 또한 한국보다 더 강한 편이다.


가장 먼저 사라지는 사람들


내가 근무하던 곳의 경영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내 노동법 이야기가 나오면 유독 예민해졌고, 정규 근로자 수가 일정 규모를 넘으면 당연히 설치해야 하는 인사규정 개정, 인사위원회나 노사협의체를 설명해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필요성을 인정하기보다는 가능하면 미루거나 피해 가려는 분위기가 더 익숙했다.


한번은 큰 사고가 터진 적이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핵심 검은머리 외국임원 한 명은 다음 날 도망치듯 가장 빠른 비행기로 한국을 떠났고,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책임을 피해가며 말만 길어졌다. 결국 가장 힘없는 실무자 한 명이 표적이 되었다. 전산상 그의 직책이 ‘안전관리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그가 조금 더 타협에 능숙하고, 영어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할 수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러 관리상의 문제와 책임, 감독 소홀, 절차 미비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그의 이름 위에 얹혔고, 결국 그는 사직을 권고받는 처지가 되었다.


정작 방만한 경영과 잘 포장된 보고, 그리고 유창한 영어로 상황을 무마해 온 이들은 복잡하게 얽힌 책임의 그물 속에서 빠져나갔다. 결국 덫에 걸린 사람은 영어로 자기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가장 약한 고리였다.


안전사고 당시의 근로 환경, 본사의 내규와 절차 준수 여부, 외주업체와의 업무 인수인계 문제 등 수많은 요소가 얽혀 있었지만, 누군가가 세련된 영어 보고서로 하나의 책임선을 그어버리면 그곳이 곧 표적이 되기 쉬웠다.

누구도 앞장서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상황에서, 더 말을 잘하고 더 가까운 사람들은 비켜섰고, 결국 평소 외국어 보고를 꺼리던 말단 직원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가지치기되는 사람들


최근 들어 새로 부임한 경영지원팀장은 이런 구조를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한 듯하다.

국내 노동법의 그늘을 고용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들을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리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능숙하게 제시하고 있다.

사내 위원회는 이전보다 자주 열리고, 소송이 남발되고, 긴장감이 돌며, 그때마다 조금씩 조직과 인력이 가지치기되고 있다.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며, 웃어야 할지 씁쓸해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런 풍경도 어느새 익숙한 기업의 일상 중 하나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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