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에세이] 내 커리어장르는 블랙코미디 - 13

#13 양아치 짓은 글로벌 기업도 예외 없다

by 직딩누아르

양아치 짓은 글로벌 기업도 예외없다.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거래를 시작하는 하청·협력업체와 처음 인사를 나눌 때면, 서로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악수를 한다.

상대는 희망에 찬 미소를 짓지만, 나는 늘 어딘가 쓸쓸한 표정이었다. 이 관계가 머지않아 대금 지급 문제로 질척한 싸움으로 번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이라도 계약을 취소하라고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있었다.


해외의 ‘선진 경영’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서 풍겨오는 냄새는 썩 상쾌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잡아야 했고, 결국 미수금의 덫에 걸린 업체들의 하소연을 듣는 역할은 늘 내 몫이었다.


국내 사업을 진행하면서 온전하게 대금을 지불할 여력이 없는데도 계약부터 체결하라는 지시가 반복됐다. 물품과 서비스는 먼저 받고, 대금은 나중에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돌이켜보면 업체에 제때 돈을 지급했던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대금은 미루고, 전화는 내가 받는다


내 업무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업체 독촉 전화 담당’이 되었다. 각 부서장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이 역할을 내게 넘겼다.

본인들은 현장 일정이 바쁘다며 업체가 사주는 식사와 술자리는 빠지지 않으면서도, 정작 독촉 전화는 받지 않았다. 대신 내 연락처를 주며 “그쪽으로 이야기하라”라고 했다.


사업 초기에는 홈페이지와 대표 연락처조차 제대로 공개되지 않아, 주문과 발주를 담당하던 나에게 모든 민원이 몰렸다.

말 그대로 총대를 메는 역할이었다.


계약 구조는 늘 비슷했다.

통상적으로는 선금 30%, 중도금 30~40%, 잔금 30%의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경영진이 수정한 계약서에는 선금 비율을 최소화하라는 지시가 반복됐다. 10% 남짓만 지급한 뒤, 물품과 서비스를 먼저 사용하고 지급일은 계속 미루는 방식이었다.

한 번, 두 번은 이해해 주던 업체들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표정이 바뀌었다. 내용증명과 소송관련 등기우편이 쏟아졌다.


한 번은 샘플 수출 건으로 거래했던 해상 운송 업체에서, “어떤 회사가 1년 넘게 백만 원을 못 주냐”며 차라리 개인카드로 결제하라고까지 말했다. 카드 단말기를 들고 찾아오겠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책임은 아래로, 압박은 옆으로


유럽과 미국 출신 경영진과 기술진이 이끄는 ‘선진 기업’이라는 이미지는 유지되었지만,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많이 달랐다.

돈도 없으면서 왜 물건과 서비스를 가져다 썼냐는 말은 때로는 사실에 가까웠고, 그 말은 고스란히 나를 향해 돌아왔다.


명절이 다가오면 상황은 더 노골적이었다. 자신들은 수금을 못 해 명절도 어렵다며, 어떻게 너희는 월급을 꼬박꼬박 받느냐는 말을 들었다. 명절에 급여를 받는 것이 오히려 눈치 보일 정도였다.


낮에는 업체들의 항의 전화를 받고, 밤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경영진의 비상식적인 지시를 받았다.

그들의 지시는,

새로운 업체를 찾아 일을 계속 진행하라는 것.


이미 업계에서는 문제가 있는 회사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먼 곳, 더 새로운 업체를 찾으라는 압박이 강해졌다.


경영진은 소송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는 쪽은 채권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늘 비슷했다.

“현재 사정이 어려워서…”


그 사이에서 나는 설명하는 사람도, 대신 사과하는 사람도, 때로는 욕을 대신 듣는 사람도 되었다. 반면 경영진은 한국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혹은 물리적으로 멀리 있다는 이유로 이 모든 상황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다.


돌아가는 회사, 멈춰 있는 숫자


회사는 지금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다만 수익으로 돌아가는 구조라기보다, 장기간의 차입금으로 버티는 쪽에 가깝다. 자본잠식 상태도 꽤 오래 지속되고 있다.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면 의문이 생길 만한 지점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여전히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외국계라는 이름, 세련된 문구, 번듯한 이미지가 그 위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회사의 가장 뛰어난 역량은, 입증할 수 있는 실적이 아니라 ‘그럴듯해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는 과장된 능력’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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