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마는 손흥민을 입는다
악마는 손흥민을 입는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처음 봤을 때, 누군가 내 일상을 베껴 쓴 줄 알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 보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서 수화기 너머로 지시를 내린다는 점 정도였다.
주인공이 겪는 사소하지만 끝이 없는 미션들, 그 과정에서 무너졌다가 다시 버텨내는 일상,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찾아오는 허탈함은 낯설지 않았다. 화면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겪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내가 이러려고 외국계 회사에 들어온 걸까.’
대표가 한국에 들어오는 날은 일종의 연례행사였다.
몇 주 전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사무실 정돈은 기본이고, 그가 즐기는 고급 커피, 락토프리, 글루텐 프리, 마늘 안쓰는 식당 리스트, 정부기관과 관계사 방문 동선까지 꼼꼼히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공식 문서 어디에도 남지 않는, 그러나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개인 미션’도 조용히 전달된다.
한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라 아직 불안하고 오래 머물기 싫다는 이유로, 그의 체류 기간은 길어야 5일.
그래서 무지 바쁘다.
작년의 미션은 대표님 명품 남성 와이셔츠 쇼핑이었다. 캐리어가 바뀌어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대신 구입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문제는 그의 취향이 꽤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아무 질감이나 디자인을 살 수 없었고, 그에게 신체 사이즈를 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고막이 울릴 만큼의 반응이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 속 체형과 사진 몇 장을 근거로 사이즈를 추정했다. 백화점 오픈 시간에 맞춰 달려가, 매장이란 매장은 모두 다 들렸다.
워낙 풍채가 있어 매장에서 구비한 가장 큰 사이즈 중에서도 그가 평소에 입는 수트의 색감, 질감, 패턴이 잘 어우러지는,
적당한 수트용 와이셔츠 두세벌 골랐다.
다행히 몇 장 안남은 제품이었다.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안전했다.
그렇게 구매한 와이셔츠는 내가 직접 택시를 타고 호텔로 ‘특급 배송’되었다. (오전 업무 다 제쳐두고 급선무로 처리했던 사안이었다)
그런데, 올해의 미션은 조금 더 까다로웠다.
손흥민이 입고 나온 국가대표 유니폼 세트였다. 자녀가 꼭 갖고 싶어 한다며, 귀국 전에 준비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축구를 잘 모른다. 그 사실이 그날만큼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주변 지인이란 지인 그들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수소문했지만 이미 품절된 지 오래였고, 간혹 나온 물건은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은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 소식을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한 지인을 통해 울산의 어떤 유니폼 매장에서 개인 소장품을 구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KTX 택배와 오토바이 퀵을 거쳐, 결국 그 유니폼은 대표의 책상 위에 놓였다.
이 모든 비용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재무팀에 ‘대표님 지시 관련 건’으로 경비를 올리면 별다른 질문 없이 승인되었다. 운영 자금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오는지는 복잡했지만, 이런 지출에 대해서만큼은 언제나 간단했다.
명품 옷이든, 축구 유니폼이든, 혹은 5성급 호텔 라운지에서의 칵테일이든—업무 관련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모두 정당한 비용이 되었다. 대표와 임원들이 모여 마시는 맥캘란 한 잔도, 그 자리에서 업무 이야기가 오갔다는 이유로 회의비로 처리되었다.
그래서인지 임원들은 퇴근 후에도 집으로 향하기보다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더 선호했다. 업무의 연장선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비용들이 재무제표 어딘가에 어떻게 숨어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주주들이 그것을 모두 들여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보이는 것과 들려주는 것만이 전부가 되기 쉽다.
이번에도 5일 만에 미션은 완료되었다.
밤 9시, 호텔 컨시어지에 쇼핑백을 맡겼다. 안에는 유니폼과 함께, 아이가 좋아할 만한 한국 간식과 필기도구를 함께 넣었다.
호텔을 나와 고개를 들었지만,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서 있다가, 별 대신 내 표정을 확인하듯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돌아섰다.
오늘도 할 일을 했다는 정도의 안도감과,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한 씁쓸함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속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도,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