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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에 따르면 자신의 정체성을 정하려는 욕망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무엇이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지,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유한 자아를 발견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비과학적인 것임을 알면서도 사주, 혈액형, MBTI 같은 도구에 눈이 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고정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히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개인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회사와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 성 정체성은 무엇인지, 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하는데 실패하는 인간은 목적지가 없는 배처럼 혼란에 표류한다. 자신의 관심사나 열정에 발붙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된다.
인간의 정체성은 가재의 껍질과 비슷하다. 갓 태어난 가재는 말랑말랑하고 투명한 상태이지만 그대로는 생존할 수 없다. 외부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껍질을 형성한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정체성에 변화를 겪는 투명한 상태가 될 때가 있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이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정체성을 확립한 인간은 더 이상 혼란을 떠다니지 않고 정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혼란은 예정된 것이었다. 나는 껍질을 형성하지 못한 가재처럼 활동가도 일반인도 아닌 투명하고 물렁한 존재였다. 세상의 문제들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비영리단체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깊이 알수록 환상이 깨졌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 느꼈다. 동시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삶을 내던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일반인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의 온갖 참상을 들여다본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겠지만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정신적 흉터였다. 상처 입은 정신은 극도로 예민했고 공감 주파수가 높아 세상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감지했다. 물을 빨아들이는 종이처럼 다른 생명들의 고통을 받아들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 안에서 증폭시켰다. 그런 나에게 단순히 생존하는 삶은 무의미했다. 죽을힘을 다해도 내 힘으로 집을 마련하거나 안정된 노후를 준비하는 데 성공할까 말까였다. 그럼에도 평생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죽는 삶은 부질없어 보였다.
활동가도 일반인도 아닌 어느 쪽에서나 위선자였다. 나에겐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새로운 껍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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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애초에 세상의 절대다수가 기후 위기, 전쟁, 빈부격차 등의 심각성을 알고 행동했다면 이는 진작에 해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은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애쓰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돌아온 나는 한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환경오염의 심각성과 인간의 탐욕 때문에 착취당하는 생명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알렸다. 일부는 내게 동의했지만 대부분 무관심했고 결과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 답답함은 나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나는 설득자로서 탈락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갇힌 나머지 어떻게 하면 세상의 문제를 더 효율적으로 해결할지 보다 끔찍한 광경들을 보고 괴로운 자신의 마음에 취해있었다. 내가 이만큼 괴롭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며 나의 생각에 동의해 주길 바랐다. 타인의 공감은 어찌 되었건 고통을 덜어주었으므로.
자신의 감정에 갇히는 순간 타인은 평면적인 존재로 변했다. 나에게 일반적인 대중은 너무나도 자명한 세상의 거대한 문제에 무관심한 단순한 생명체로 보였다. 그들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해되기보다는 교정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나는 나의 감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의 복잡성을 간과했다. 내가 기후 위기에 무관심하다고 판단했던 사람들 중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일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당장 체감이 되지 않는 추상적인 문제들보다는 당장 이번 달 월세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정보와 요구에 압도되어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나에겐 그것이 단순히 무관심으로 보인 이도 있었다. 내가 무관심이라고 여긴 태도 뒤에는 이토록 복잡한 사정들이 숨어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얼마 지나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나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왜 그럴까? 누군가가 사회문제와 관련된 일에 몸을 내던지는 이유 중 하나는 도덕적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뒤틀린 부분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생명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그들은 세상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공감 능력이 극에 달한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현실적인 계산보다는 자신 안에서 솟구치는 연민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기준 삼아 남들이 외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다.
사회문제를 최전선에서 해결하는 업을 가진 사람, 그중에서 자신의 감정에 압도된 이는 끊임없이 타인의 감정을 자극한다. 본인이 아는 가슴 아픈 현실을 타인들도 알게 된다면 자신처럼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나 자신의 뜻에 동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바람은 때때로 뒤틀린 형태로 이어진다. 그들은 기후 위기를 알리기 위해 미술관에서 페인트를 뿌리고 삼겹살집에 들어가 육식은 폭력이라고 외친다. 그들이 말하는 문제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이 정말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을까? 그것을 보고 정말 공감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까? 극단적인 행동들은 당연히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다. 그들의 원동력이 되는 감정은 그들 자신을 대중들로부터 단절시킨다. 이는 개인이나 영세한 단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규모가 있는 환경단체조차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광고에서 북극곰을 구해달라거나 지구가 아프다는 유아적인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던진다.
물론 듣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마케팅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듣는 사람에 대한 고려가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 출산율이 바닥을 치고 우울증과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의 위기인 기후 위기를 신경 써야 하는지, 노인 빈곤율 1위인 나라의 국민들이 왜 다른 나라의 난민을 신경 써야 하는지, 물가는 점점 오르는데 왜 굳이 비싼 비건이나 동물복지 제품을 사야 하는지, 비영리단체가 그 많은 기부금을 받았음에도 왜 아직도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의 문제들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보여주지만 물질주의의 물결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대중들에게 밖으로 나와 선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득하지 못한다.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나의 정체성은 활동가나 비영리단체의 구성원도, 일반인도 아닌 그 무언가 일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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