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의 맛

by 흑선백지

1

누군가가 이타적인 행동이 이기심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동의할 것이다. 구직으로 바빴던 20대 중반의 나에게 기부는 죄책감을 해소할 수 있는 손쉬운 행동이었다. 나는 세상의 뒤틀린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이들에게 약소한 금액을 가끔씩 전달했다. 기부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면 자신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정신이 쏠린 속물이 아니라고 속으로 말하며 도덕적 포만감을 느꼈다. 그리고 비로소 세상의 가슴 아픈 문제들에 신경을 끄고 다시 이력서를 쓰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평소처럼 기부를 하려던 어느 순간 나는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나의 기부 금액이 하찮아서도, 어차피 세상은 안 바뀐다는 생각도, 이따금 나오는 어떤 비영리단체가 기부금을 횡령했다는 뉴스 때문만도 아니었다. 나는 나의 숙제를 남에게 맡기고서 찝찝해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의 역할을 남한테 떠넘기는 데서 오는 불안이었다.


2

바야흐로 뭐든 대신해 주는 시대다. 돈만 내면 어린이 집에서 밤늦게까지 아이를 봐주고, 요양원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대신 돌봐준다. 마트에서는 기계가 점원 대신 계산을 도와주며 식당이 음식을 대신해주는 것을 넘어 따끈한 상태로 현관까지 가져다준다. 이런 서비스들의 탄생 과정은 대부분 납득할만하다. 먹고살기 바쁜 현대인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기에는 시간과 체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돈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해결책을 선택한다. 물론 이것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리함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예를 들어 맞벌이하는 부모보다 어린이집 교사와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아이들은 부모보다 교사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야근을 끝내고 자신을 데리러 온 부모를 보면 교사에게 매달려서 운다. 이러한 상황이 부모들에게 힘든 것은 그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아이를 관심과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상대적으로 강한 오늘날의 부모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단순히 아이를 낳고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존재로 한정 짓지 않는다. 그렇기에 직장 때문에 아이를 오랜 시간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 현실은 자신의 정체성과 어긋난다. 자신이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효를 강조하는 문화권에서 자란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치매 걸린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야 하는 현실에서 자식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자신의 역할이 학생에게 인성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사는 대학 입시만을 강조하는 교육 현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즉 어떤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반대로 특정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범죄자에게 제대로 된 벌을 내리지 못하는 판사나 요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요리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여러 정체성의 필수 역할들을 훑어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인간임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역할은 무엇일까? 내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보편적 역할 중 하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력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자일 뿐이고 그 목적은 생존을 통해 달성된다. 모든 인간은 생존을 향한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나고 죽은 수많은 인간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력의 사슬로 이어져있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생존을 위한 모든 행동을 부모에게 맡긴다. 아기가 울면 부모는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 아기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문제들을 대신 해결해 준다. 하지만 우리는 커가면서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고 그러길 요구받는다. 사회는 성인이 된 자식이 부모로부터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것을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중증 장애인, 극빈층 같은 경우는 예외이며 이러한 일반적 평가의 오류를 지적하는 연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2030세대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자신이 아직도 부모의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만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괴로움이 가시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반응일 것이다.


3

내가 기부를 하면서 느꼈던 불편함은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사회문제를 자신과 동떨어진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라는 단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구성원의 안위에 위협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일부 환경단체들은 기후위기가 인간 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알고 있었지 오랜 시간 이를 북극곰과 연결 짓는 공익광고를 내보냈다(일부는 아직도 그러고 있다). 녹고 있는 빙하에 애처롭게 매달려있는 북극곰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에게 후원금을 보내 북극곰을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본 대다수는 ‘근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최근 들어 열사병으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식량 생산에 차질을 주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기후위기를 북극곰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방송에서 이대로라면 몇 년 안에 인류가 멸종할 수 있다며 반복적으로 경고했다. 기후위기가 불러올 암울한 위기에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대신해 주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익숙해진 나는 자연스레 기부를 떠올린다. 나 대신 기후위기를 해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푼돈을 보낸 후 도덕적 포만감을 느끼며 돈벌이라는 다른 생존에 집중하려 한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자 역시 나의 생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 아닐까? 나의 도덕적 만족감을 위해 기부를 하는 순간 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나의 역할을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기후위기 앞에서 개인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무엇을 '대신'하고 무엇을 '직접'해야만 진정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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