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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나는 철학자를 꿈꿀 정도로 철학을 좋아했다. 나는 중간고사가 끝난 당일에도 도서관에서 벽돌 같은 두께의 책을 밤늦게까지 보았다. 그 내용의 절반에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막연하게나마 철학이라는 학문이 주는 가치를 느끼고 있었다. 책을 통해 옛 학자들의 생각을 접할 때마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근원적인 질문들, 예를 들어 진리는 무엇인가, 이 세상은 진짜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것들이 서서히 해소되었다. 청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는 농담이 있다지만 나는 진지하게 대학원에 가는 것을 생각했다.
반대로 학교의 강의에는 못했다. 그것은 철학이라는 학문의 추상성이나 난해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의를 하는 교수들은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몇 백 년 전에 죽어 가루가 된 학자들의 사상이 현재의 학생들이 살아가는데 어떠한 도움이 될지에 숙고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서 도움은 당연히 물질적인 것을 뜻하지 않았다. 철학과 학생은 희귀한 경우가 아니라면 강의 내용이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거나 취업 활동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기대는 분명히 있다. 현대에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떤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 부모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 그럼에도 내가 만났던 교수들은 이에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중 한 교수는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팔자주름이 깊고 갈색 정장을 자주 입던 50대 중반의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강의실의 학생들은 역병에 걸린 가축 마냥 쓰러졌다. 물론 그의 메시지는 수백수천 년을 이어져온 인류의 지적 유산이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듣는 이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불필요한 전문 용어가 난무했고 난해함을 위한 난해함이 반복되었다. 철학으로 학생들을 인도하는 안내자가 아니라 장벽 같았다.
그는 수업 중 인문학의 위기를 자주 언급하며 현대의 물질주의적인 사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물론 자신의 고루함이 인문학의 위기에 기여한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평소 철학에 흥미가 없던 학생들은 이런 수업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전공에 대한 애정이 깎여나갔다. 안 그래도 취업에 불리해서 불안했던 학생들의 강의실을 나가며 무엇을 복수 전공하고 어떻게 전과를 할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교수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연구실로 돌아갔다. 하루는 그에게 질문하기 위해 수업 후 그를 쫓아갔다. 그가 계단을 몇 단 올라갔을 때 나는 그를 불렀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계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늘 때문인지 그의 팔자주름이 더욱 깊어 보였다. 내가 수업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고 질문하자 그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일신우일신하면 된다”
그는 바로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 자신의 연구실로 걸어갔다. 연구실의 열린 문틈 사이로 방 내부가 보였다. 방 한가운데 책상을 둘러싼 책장의 먼지 쌓인 고서들은 마치 감옥의 철창처럼 세상과 방의 주인을 가로막았다. 교수가 들어간 방은 세상의 진리를 연구하는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 있을수록 그와는 멀어질 듯했다. 그곳은 나에게 반쪽짜리 세상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교수가 한 말을 검색했다. 일신우일신. “진실로 하루 새로워진다면,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 대학(大學)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교수는 노력하라는 간단한 말을 하는데도 옛 고서의 말에 기대어야 했다. 나도 대학원에 가서 철학 석박사를 딴 후 교수가 되면 저렇게 되는 건가? 갑자기 입이 텁텁해지는 것 같았다.
정도만 다를 뿐 다른 교수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보였다.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식어 졸업쯤엔 다른 진로를 생각했다. 나에게 위안을 주었던 고전의 문장들은 익숙함을 넘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안 보이던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앞날이 불안한 학생이었고 그 과정에서 철학이라는 고고한 세상에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철학은 분명 가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마음속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다.
일반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부랴부랴 인턴 경험을 쌓았고 토익 시험을 준비했다. 물론 그렇다고 철학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이때의 나는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외제차를 몰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업의 인적성 시험이나 공모전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여전히 철학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좁은 상자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모순적인 욕망이 존재했다.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 책은 반쪽짜리 세상이었다. 전체는 광활하지만 탐욕적이며 진리와 동떨어진 속세까지 포함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곳을 경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과거에도 철학자도 일반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였던 셈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 몇 년 후 TV에는 철학과 대중을 잇는 중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방송에 나와서 강연을 하는 기존의 전문가들과 비슷해 보였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공통적으로 자신의 분야를 대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했다. 자신들의 전문분야가 대중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보는 눈과 이를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있었다.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가진 이들은 철학, 물리학, 뇌과학, 역사, 건축 같은 학문적인 분야뿐 아니라 육아, 반려동물, 요리 같은 분야에까지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유튜브가 성장하면서 이들의 활동 범위는 더 넓어졌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려는 열정이 있었다.
물론 이 중개자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대중의 이해와 흥미를 우선시하다 보니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사실과 다르기도 했다. 전달자의 전문성이 의심받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철학 박사 학위도 없는데 철학에 대해서 강의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대중들의 변화를 위한 다리가 되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물건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육아 방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공계 출신이 아니어도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삶이 힘들 때 철학 책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생 때 이런 중간자들을 만났다면 나는 철학을 계속 공부했을까?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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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문제에 대해 이도 저도 아닌 입장을 취하는 개인은 어떤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까? 나는 중간자들을 보고 단서를 얻었다. 이들이 활동하는 분야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양 극단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기존의 한 극단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앞선 이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역할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대중의 눈높이에서 소통했다. 물론 이를 위해 중간자들은 나름의 대가를 치른다.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거나 대중이나 자신의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를 감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해 활동가도 일반인도 아닌 어중간한 정체성을 가진 나는 이를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일부 비영리단체나 활동가들은 정의롭지만 때때로 대중을 설득하는데 서투른 모습을 보인다. 반대로 일부 대중은 눈앞의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위험을 보지 못한다. 이도저도 아닌 나는 활동가처럼 타자의 고통에 민감한 동시에 일반 대중처럼 현실에 발바닥이 닿아있다. 나는 반 쪽 세계가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다.
내가 다른 영역의 중간자와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 나에 도덕적인 판단이 추가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자와 대중 사이에서 대중에게 양자역학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이 위선자 취급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활동가와 대중 사이에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못하는 인간은 양 극단의 존재에게 위선자로 보일 수 있다. 마치 중도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극보수에겐 진보로, 극진보에겐 보수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세상의 문제에 발 벗고 나서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은 사람의 위선을 양쪽을 잇는 다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대중과 활동가의 중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세상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설득할 수 있는 존재, 나의 새로운 정체성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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