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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없는 성인을 가리키는 말인 백수(白手)는 ‘일을 안 해 손이 하얗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직업의 목적이 생계유지임을 생각하면 일을 한다는 것은 생존하기 위해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힐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일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물리학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다고 믿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미국의 천재들은 나치가 자신들을 먼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든다는 과학적 성취에 이끌려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결과물이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졌을 때 전장의 미군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조선은 일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있는 수십만의 민간인들이 죽었다. 그중에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도 수만 명 있었고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와는 무관한 일본인들도 있었다. 오펜하이머, 실라르드, 로트블랫 등의 과학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던 오펜하이머는 후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서 말했다.
“대통령님, 전 지금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입니다.”
반면 텔러, 로런스 같은 과학자들은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더 강한 무기가 있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핵무기의 개발과 군사적 활용을 계속 지지했다. 그들에게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은 단순한 군사 프로젝트가 아니라 과학 발전의 기회였다.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어도 직업의 도덕적 딜레마는 존재한다. 세계대전의 종식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물리학자가 아니라도 도덕적 감수성이 높은 이라면 자신의 직업이 가지는 명과 암을 마주한다. 동물 실험을 하는 의학자는 질병 치료라는 가치와 함께 동물권 침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석유 회사의 직원들은 인류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동시에 기후 위기를 초래하며 소셜미디어 개발자는 대중의 정보 공유와 사회 참여를 이끌어내지만 가짜 뉴스, 중독, 사회적 양극화 등을 야기한다. 소수를 제외하면 직업이라는 것은 세상에 선과 악을 동시에 미친다.
하지만 현실은 개인이 한가하게 자신의 직업에 대한 도덕적인 고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회사는 자신이 팔아야 할 제품에 도덕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영업사원한테 월급을 줄 만큼 자비롭지 않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온다. 자신의 업이 만들어내는 어둠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밀린 대출금을 갚고 더 높은 실적을 내는 유능한 직업인이 되려 노력한다.
맹목적으로 충실한 직업인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선례는 나치 독일일 것이다. 이들은 2차 대전 때 독일의 전통적인 직업관을 이용하여 자국민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 공동체 의식과 민족주의에 취한 국민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규율을 준수하며 근면 성실하게 유대인을 죽였다. 그들은 도덕, 양심, 죄책감 등에 한눈팔지 않고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이었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충실히 맡은 바를 다한 결과 그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중 유독 특출 났던 직업인들은 독일이 패한 후 전범 재판에 입을 맞춘 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자신은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며 개인적 책임이 없다. 개인적으로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현대의 직업인들에게서 전범들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는 것은 분명 무례한 발상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직업 대부분은 나치처럼 직접적인 악행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조심스레 질문해 본다. 나의 직업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정말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나의 실적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정말 몰랐는지, 그것들이 먹고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물론 이런 비실용적인 고민을 하는 구성원들이 많을수록 사회는 훨씬 느린 속도로 굴러간다. 더 많은 개인이 주어진 업무가 아닌 양심과 도덕에 한눈을 파는 순간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는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패스트패션으로 생산되는 값싼 옷을 살 수 없을 것이고 음식을 편리하게 배달할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가 사라질 것이다.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는 일본 속담처럼 이 거대한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선 때로는 문제를 무시하는 유연함도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칼끝은 언젠가 나를 겨냥한다.
2
쿠알라룸푸르에서 돌아온 내가 1년 동안 취업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도덕적 결벽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고살기 위한 나의 욕심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거나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망치는 일로 돈을 벌기는 싫었다. 그러자 예전에는 그토록 들어가고 싶던 회사들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된 그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그곳의 사원증을 목에만 걸 수 있다면 무엇이든 손에 묻히겠다는 과거의 각오는 안개처럼 흩어졌다. 채용공고를 보아도 지원하지 않는 회사들이 늘었다.
나의 관심은 사회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기업인 소셜벤처로 옮겨갔다. 한국에 몇 안 되는 배양육, 태양광, 비건 제품 등을 개발하는 회사를 알아보았지만 국내 소셜벤처의 특성상 재정적인 여유가 없어 사람을 뽑는 경우가 적었다. 소셜벤처 쪽에서의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나는 이전에 몇몇 비영리단체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실망감을 느꼈다. 일부 기업들은 사회 문제 해결에 큰 영향이 없는 ‘보여주기식 사업’을 운영하면서 정부 지원금을 타 먹고 있었으며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하기 못해 수년 내에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열정 페이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는데 어떤 회사는 면접에서 자신들이 선한 일을 하니 무급으로 일해줄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한두 개의 회사에서는 최종적으로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다.
구직 기간이 길어져 프리랜서로 일했지만 결벽증은 계속되었다. 나는 고객의 마케팅을 위해 보도자료나 웹페이지 문구를 쓰는 일을 했다. 프리랜서 플랫폼에 나에 대한 소개 글을 올리자 이따금 문의가 오곤 했다. 단골 고객이 없는 초보 프리랜서의 경우 이런 작은 의뢰에서 시작하여 작업 수를 늘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손을 더럽히기 싫어했다. 하루는 담배 회사에서 제품 홍보 글을 써달라는 업무 의뢰가 왔다. 나는 거절했다. 누군가를 중독에 빠지게 하고 건강을 해치는 물건을 파는 일에 기여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엔 밍크털로 마스카라를 만드는 회사가 업무를 의뢰했다. 거절했다. 누군가의 생존이 아닌 속눈썹을 돋보기에 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인 제품을 팔고 싶지 않았다. 이리 재고 저리 재다 보니 나의 수익이 적은 것은 당연했다.
내가 도덕적 결벽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이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장애도, 갚아야 할 대출금도, 간병해야 할 가족도 없었다. 부모는 서울의 상류층은 아니었지만 웬만큼 먹고살 만큼의 고정적인 수익이 있었다. 성격도 극성스럽지 않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당장 해야 하는 압박감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원하는 직업을 편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만약 부모를 잘 만나지 않았다면, 더 재수가 없어 삼팔선 아래가 아닌 위에서 태어났다면 나의 이타심은 높은 확률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것이 범죄가 아니라면 법의 허점을 파고들든, 다른 생명을 착취하든, 환경을 파괴하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내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며 돈을 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타심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의 비교적 자유롭다는 행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행운에 대한 책임도 따르는 것 아닐까? 나보다 상대적으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노동에 속박된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도덕적 고민을 나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사회 지도층이나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모범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나는 정치인이나 재벌도 아닌 중산층 집안의 평범한 구직자이기에 이러한 책임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분이나 생활 수준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것을 자주 망각한다. 아무리 내가 바닥을 뚫고 지하로 추락해도 그 밑에는 나를 올려다보는 누군가가 있음을 기억하면 나 같은 사람도 가진 자가 보여야 할 모범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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