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초행복량'은 안녕한가요?

보이지 않았던 '췌장'과 '행복'을 찾기 위한 노력

by 검은색달

내 췌장이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게 아니라, 지방에 파묻혀서.


작년 1월에 내과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작년이라니… 쓰고 나니 징그럽다. 일단, 다들 새해 복은 사양하지 말고 많이들 받으시길.

대장과 위장 내시경을 하고 복부 초음파 검진을 받고 며칠 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검진 결과가 나왔으니 다시 내원해 달라는 전화였다. 날짜를 잡고 다시 방문한 병원에서 나를 의자에 앉힌 의사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혹시… 술자리가 잦으세요?"

"네."

"술은 일주일에 며칠 정도 드시나요?"

"음…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일주일에 세네 번 정도?"

거짓말이었다.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기본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의사는 한동안 말없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런 의사의 모습을 보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아… 뭐지? 큰일인가? 그냥 솔직히 일주일에 네다섯 번이라고 말했어야 했나?'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의사는 모니터에게 향했던 시선을 내게 옮기며 말했다.

"음… 비만이네요."

영글지 않은 떫은 감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처럼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의사 양반. 내가 비만이라니? 내가? 내가 비만이라니?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니터를 돌려 초음파 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이게 내장 초음파 사진인데, 여기 하아아아~~ 얀 부분 보이시죠?"

의사가 마우스로 표시해 준 부분은 마치 검정 카펫에 하얀 잉크가 쏟아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내장지방이에요. 내장 지방이 너무 두꺼워서 췌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예요. 마른 비만이라는 말 들어 보셨죠? 환자분이 마른 비만이세요. 좀… 심하시네요."

그 뒤로 의사는 내게 내장 지방 과다로 생기는 병변들을 나열해 주었다. 이어진 위장과 대장 내시경 검진 결과는 '양호합니다'라는 짧은 단어로 마무리됐다. 인사를 하며 일어나 방을 나서려는 나에게 의사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다이어트하세요."

베일에 가려진 췌장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내장 지방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유산소 운동', '식습관 개선'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만큼이나 많이 언급된 단어는 '기초대사량'이었다.

기초대사량은 우리 몸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말한다. 심장을 뛰게 하고, 호흡하고, 체온을 유지하고, 뇌를 활동하게 하는 등에 쓰이는 에너지들의 총합이 바로 기초대사량이다. 기초대사량이 높으면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꾸준히 소비하고 있다는 말이고, 이는 더 많은 열량을 섭취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마른하늘에 비 오듯 가던 헬스장을 술자리 가듯 방문했다. 테니스코트를 더 자주 밟았고 짬을 내서 율동공원을 뛰었다. 달력이 두 장 넘어가는 기간 동안 열심히 이어진 나의 '다이어트 및 기초대사량 올리기 프로젝트'는 꽤 성공적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나의 건강한 췌장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초록 들판이 낙엽으로 뒤덮이고 찬 바람이 낙엽을 밀어내기 시작할 무렵, 나는 다시 한번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몸이 아닌 정신이 문제였다. 몇 달 동안 이어진 강도 높은 업무, 그리고 실패. 올바르지 못한 선택으로 인한 좌절과 실망. 그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절과 자기 비하까지. 당시의 나는 말 그대로 망가진 로봇 같았고 처음 겪는 고통에 재빨리 정신과 전문의를 찾았다.

검사는 내시경이나 초음파보다는 훨씬 편했지만 결과는 훨씬 불편했다. 나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긴 시간 부피를 키워가던 마음의 염증이 곪을 대로 곪아 터져 버린 듯했다. 그 원인은 모두 과거에 있었고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더욱 절망했다.

내과에서 검진 결과를 듣고 나올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다이어트와 기초대사량 증가라는 정답이 있었지만 이번 문제는 정답이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피식하고 웃었다. 내 몸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끌어올렸지만, 정작 그 몸으로 살아가는 내 삶을 건강히 유지할 에너지가 처참히 떨어져 버렸다는 게 우습고 허무했다.


우울증은 나를 산채로 집어삼켰다. 시도 때도 없이 급작스럽게 나타나 나를 공격하는 우울의 게릴라전에 나는 응전조차 하지 못했다. 3일 동안 샤워를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욕실까지 가는 5미터가 에베레스트였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르면 걱정과 후회였고, 무언가 잊히면 희망과 즐거움이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내가 우울증이란 마음의 병 때문에 이런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난 소파에 누워 아무 의미도 없는 유튜브 영상 속에 몸과 마음을 던져버리는 것으로 백기 투항을 대신했다.


그런 나를 일으켜 세워 양손에 용기를 쥐여준 사람이 있었다.

외장하드를 정리하다 우연히 클릭한 영상. 그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화면 속 남자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앳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그 남자는 모험심과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활기차고 용감했다. 카메라와 함께 길을 걷고, 야경에 감탄을 하고, 혼자 투덜거리고, 한강에서 롱보드를 타고, 파티에서 디제잉을 하고, 어설프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 남자는 바로 10년 전의 나였다.

지금의 나와는 외모도, 행동도, 태도도 너무 달라 화면 속의 남자가 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다양한 영상들이 편집되어 이어지는 2분가량의 짧은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은 롱보드 트릭을 시도하던 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화면에 떠오른 문장은 우울을 향한 반격의 신호탄이 되었다.

'Enjoy your life. NOW.'


IMG_3314.PNG 행복했던 내 모습을 담은 영상의 마지막 장면




나의 기초행복량을 올려야 했다.

우리 몸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가 기초대사량이라면, 우울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쌓아두어야 하는 행복의 축적량을 나는 '기초행복량'이라 부르기로 했다. 기초행복량을 끌어올려두면 행복이 바닥나서 우울에 잠식당하는 일은 없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카페에 앉아 눈을 감고 기억을 헤집고, 사진첩을 뒤지기 시작했다. 날 행복하게 했던 일이나 사건 등을 찾기 위해서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멈췄다 다시 쳤다를 반복했다.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렇게 적었나. 아니, 기억이 이렇게 희미했나?

어렵게 찾아낸 순간들을 노트북에 정리했다. 솔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솔직함을 넘어 노골적인 부분까지 적었다. '건우와 생맥주 24잔을 마셨던 날',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안양유원지에 도달했을 때', '생애 첫 유럽 여행을 가서 쾰른 성당을 봤을 때’ 등등. 다양한 기억들이 노트북 화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거북이처럼 앞으로 길게 튀어나온 목이 뻐근해질 무렵, 기초행복량을 위한 리스트가 완성되었고 나는 천천히 목록을 살폈다.

나이를 먹을수록 줄어드는 기초대사량과 달리, 역설적이게도 나의 기초행복량은 나이를 먹을수록 감당하기 벅찰 만큼 비대해져 있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행복의 ‘기본값’ 자체가 너무 높아지다 보니,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은 이제 기초행복량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입구컷을 당하고 있었다.

바람 부는 겨울날 대학교 앞 주차장 바닥에 앉아 소주 몇 병과 번데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했었던 기억이지만, 이젠 따뜻한 오뎅바에서 시샤모구이와 고급 사케를 마셔도 행복하단 생각이 들지 않게 된 것이다.


이처럼 행복 기준이 높아진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갑자기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본 스누피 사진에 쓰여 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오래된 연인들을 향한 조언으로 올라왔던 이 문장이 나의 기초행복량을 완벽하게 설명했다. 나이가 들었다는 건 더 많은 날을 살아온 것이며, 동시에 더 많은 경험과 체험이 쌓였다는 뜻이다. 경험과 체험은 우리에게 친숙함과 안정감, 익숙함을 선물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새로움과 호기심, 그리고 소중함을 앗아간다.

놀이공원에서 처음 바이킹을 탈 땐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스릴을 만끽하지만, 손님이 없다며 4번 연속으로 바이킹을 타게 되면 스릴 대신 멀미만 느끼게 되는 것처럼 새로움과 호기심이 없는 일상은 하품 나오게 지루하고 따분한 하루의 반복이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바이킹은 달라진 게 없다. 최고점의 높이, 바닥을 향한 각도, 내려오는 순간의 속도,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로 인한 중력 가속도까지. 처음과 똑같다. 단지 그 안에 올라탄 나 자신이 그것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그 높이와 속도, 중력 가속도가 낯설어지면 사람들은 다시 바이킹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커다란 배가 앞뒤로 크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양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고 바람을 맞으며 아찔한 스릴을 느낀다. 행복한 비명과 함께.

익숙함은 나의 추억 속을 똑똑한 로봇 청소기처럼 돌아다니며 군데군데 묻은 소중한 행복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청소기의 흡입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웬만한 행복은 깡그리 빨려 들어가 버렸기에 나의 기초행복도는 가파르게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로봇 청소기의 전원을 꺼야만 했다. 흘러가는 대로 익숙해지기보다 거슬러 올라 낯설어질 필요가 있었다. 일상에서 소중한 행복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생각이 정리되었으니 행동할 차례였다.

행복 리스트에 적힌 활동들을 무작정 실행에 옮겼다. 완벽히 재실행할 수 없는 활동들은 가능한 비슷하게 대체했다. 이유 없이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었고, 홀로 짧지만 자유롭게 여행을 떠났고, 설레는 공상을 하며 글을 썼으며, 일이 없는 친구와 평일 낮부터 술잔을 비웠고, 사람들과 몸을 부딪치며 농구를 했고, 오랜만에 카페에서 모임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눴다.

이를 통해 나는 우울증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찾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사실 우리 삶은 그렇게 쉽고 극적이지 않다. 익숙해져 버린 권태와 나태란 바이킹에서 내려 이제 겨우 출구를 빠져나온 정도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밟은 지상은 무기력과 우울에서 벗어나 달려 나가기에 충분히 단단하고 넓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잘하고 있다는 지속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 ‘지속’이라는 단어가 모호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우리가 운동을 할 때 정말 힘든 건 고중량을 한 번 드는 것이 아니라, 헬스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일 년 내내 멈추지 않는 것이다. 행복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 번의 화려한 여행이나 짧은 일탈이 행복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끈기 있게 유지하는 것. 즉, 웃을 만한상황 기다리는 아니라 웃을 있는상태 나를 지켜내는 .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한 지속의 진짜 얼굴이었다.


행복은 상황이 아니라 상태였다. 그 상태는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개인의 노력을 통해 지속하는 것이다. 직장 생활도, 인간관계도, 꿈을 향한 도전도, 올라간 기초대사량도,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이 모든 게 개인적 지속이다. 낭떠러지에서 밧줄 하나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의 꽉 쥔 양손이고, 우아하게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의 발버둥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다. 노력은 우리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아닌가. 가만히 소파에 앉아 티브이나 보면서 행복을 원하는 건 양심도 염치도 없는 바람이라 할 수 있다. 안온한 삶, 가치 있는 날들, 높은 자존감과 자긍심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해야 한다. 기초행복량의 증대를 위해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 소중한 일을 당연히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속할 수 있는 끈기와 인내심도 챙겨야 한다.

물론 이는 헬스장 3개월 등록하고 석 달 내내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 본다. 내가 내장지방을 빼고 췌장을 찾아낸 것처럼.


기억하자. 아무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원인 모를 불안과, 쓸데없는 걱정, 나에 대한 의심. 그리고 내장지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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