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층에 지갑을 두고 왔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by 검은색달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3년 전의 일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여름의 태양은 그 힘을 아주 확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기말고사 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난 코앞으로 다가온 입대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입대를 앞둔 청년이 다 그렇듯, 나 역시 우리나라 연간 주류 소비량의 비약적 상승을 도모하고 있었다. 학교 정문 앞 마트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인문대로 걸어갔다. 인문대 앞 잔디밭 그늘에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셨다. 앞으로 2년간 돌아오지 못할 못생긴 인문대학 건물을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못생긴 건물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한 명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 날 보더니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세 학번 선배인 J형이었다.

"너 혼자 여기서 뭐 하냐?"

"그냥… 할 것도 없어서 맥주나 마시고 있었어요. 형 한잔하실래요?"

"미친놈아. 나 바로 수업 있어. 낮부터 왜 혼자 청승이냐?"

"그냥요. 아… 진짜 군대 가기 싫어요."

J형은 진짜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야. 너 진짜 더운 날 우리 과 사무실에 가야 돼. 그래서 4층까지 걸어 올라갔어. 가서 일 보고 집에 가려고 1층까지 내려왔어. 근데 생각해 보니까 과 사무실에 지갑을 두고 왔네? 그럼 어떡해? 짜증 나도 다시 올라가야지. 그치? 네 인생에 군대가 딱 그 정도야. 못할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야. 그냥 좀 힘들고 짜증 나는 거지. 남들도 다 하는 거고, 지나고 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혼자 이 지랄 떨지 말고 기운 내라."

J형은 자신이 뱉은 말처럼 가볍고 무심하게 돌아서 떠났다. 후드득 흩날린 그 이상한 위로를 난 열심히 주워 담았다.

그 뒤로 꽤 오랜 시간,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난 필요할 때마다 그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입대하는 날 혼자 갔던 논산 훈련소 연병장에서도 그랬고, 어린 시절 나를 키워주신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처음 입사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도, 열심히 준비한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도 기억을 뒤적거려 J형의 말을 떠올렸다.

내 삶에 계단은 지겹도록 자주 나타났고 난 계속해서 그 계단을 오르내렸다. '극복', '탈피', '실현', '도전' 같이 그럴싸한 목적이나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가야 하는 길이라 올랐을 뿐이다. 땀이 나고 눈물이 나고 신발 끈이 풀리고 발뒤꿈치가 까져도 그래야 했다. 모두의 삶이 다 그렇다. 대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그 계단의 높낮이가 다를 뿐이다.




2년 전 봄, 나는 새로운 계단 앞에 섰다. 그 계단은 지금껏 내가 올랐던 계단과는 달랐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계단이 아니었다.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계단, 오르지 않아도 됐지만, 그럼에도 기어이 오르기로 결정한 계단, 바로 ‘유튜브’라는 계단이었다.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나라는 부품의 쓸모가 점점 희미해진다고 느꼈다. 매일 똑같은 업무, 비슷한 결과, 그저 그런 삶. 내가 꿈꿨던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른 하루하루였다. 그래서 시작한 게 북튜브였다.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하고, 감상을 정리해서 영상으로 만들어 올렸다. 알고리즘은 파도처럼 변덕스러웠고, 시청자들은 겨울바람처럼 냉정했다. 춤을 추는 조회수 따라 내 자신감도 곤두박질쳤다. 퇴근 후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던 편안한 저녁은, 컴퓨터 앞에 앉아 편집과 씨름하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침대에 쓰러지는 밤으로 대체됐다.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갑'이 떠올랐다. 그날의 상상 속에서 내가 짜증을 삼키며 다시 4층으로 올라갔던 건, 그곳에 두고 온 지갑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사서 고생을 하며 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아마도 지난 십수 년간 직장 생활이라는 평지를 걸으며 어딘가에 '진짜 나'를 두고 왔을 것이다. 내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것, 나만의 생각이라는 지갑. 그걸 되찾으려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더라도 다시 올라가야만 했다.


열심히 계단을 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새벽에 잠이 깬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이대로 회사를 다녀도 될까? 북튜브를 하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일까? 둘 다 놓치면 어떡하지? 노후 준비는 제대로 되고 있는 걸까? 그럴 때면 가만히 천장을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계단이 어디쯤일까. 3층일까, 4층일까. 혹시 다른 건물로 가는 계단일까?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다만 확실한 건, 지금도 난 계단을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는 오늘도 보고서를 쓰고, 전화를 받고, 거래처 눈치를 본다. 집에서는 카메라 앞에 앉았다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칭찬받을 때도 있고 무관심에 묻힐 때도 있다. 계단은 계속 나타나고, 나는 계속 오른다. 짜증이 나도, 다리가 아파도 올라간다. 그 계단 끝에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가끔 J형 생각을 한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슨 계단을 오르고 있을까. 그 역시 나처럼 중년의 계단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까. 그때 그 선배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기가 던진 말 한마디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의 발걸음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그 말은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약속이기도 했다. '남들도 다 하는 거고, 지나고 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지금 내가 헐떡거리는 이 순간도,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냥 오르면 된다. 발뒤꿈치가 까지고, 땀이 나고, 숨이 차도 상관없다. 계단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계단이 남아있다는 건, 아직 내가 가야 할 곳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오늘도 신발 끈을 고쳐 맨다. 당신도, 그리고 나도. 우리가 오르는 이 계단 끝에, 꽤 괜찮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며.

이전 05화당신의 '기초행복량'은 안녕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