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록의 요리와 나의 부끄러운 독서

박제된 지식이 아닌 삶으로 증명하는 철학

by 검은색달

'흑백요리사 시즌 2' 결승전, 나는 맥주 한 캔을 따며 TV 앞에 앉았다. 마쉐코 때부터 응원했던 '조림핑' 최강록의 화려한 피날레를 기대했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는 순간, 나는 맥주를 뿜을 뻔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요리 한 그릇. 그리고 빨간 뚜껑의 소주 한 병.

"미쳤나?! 결승에서??"

대한민국이 다 아는 조림 장인이 왜 하필 결승전에서 동네 술집 안주 같은 걸 내놓은 건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셰프의 떨리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지금껏 척하며 살았습니다. 근데... 내게 하는 요리에서만큼은 척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순간, 맥주가 건넨 은근한 취기가 사라졌다.

그것은 단순히 요리사의 고집이 아니었다. '진짜'가 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의, 떨리는 고백이었다.

흑백요리사 시즌2 최강록의 결승전 요리 (출처-넷플릭스)

나는 '척' 전문가다.

사무실에서는 뭐든지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고, SNS에는 활짝 웃는 사진과 행복한 감정을 글에 담아 올린다. 실제로는 월요병에 죽어가면서. 지난주에는 지인이 물었다. "형, 요즘 유튜브 채널은 좀 어때요?” 속으로는 조회수도 안 나오고 구독자도 안 늘어서 너무 불안하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턱을 괴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회수? 구독자? 이런 거 신경 안 써.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 뭐.” 지인은 내 말에 감탄했고,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게 내 일상이다. 어쩌면 '척'은 도태되지 않기 위한 현대인의 서글픈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는 순간, 무방비 상태로 세상의 평가라는 칼날에 온몸이 베일 것 같았으니까.


나의 독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점에 가면 늘 두 권의 책 사이에서 고민한다. 손이 가는 책은 언제나 가볍고 재미있는 에세이나 소설이다. 하지만 결국 계산대에 올리는 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나 ‘존재와 시간’ 같은 육중한 철학서다.

왜?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요즘 뭐 읽으세요?"라고 물으면, "아, 최근에 하이데거 다시 읽고 있어요"라고 답하는 나. 실제로는 50페이지 읽고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면서.

가끔 독서모임에서 그런 책들을 권했다. "이번 달은 이 책 어떠세요?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고전이죠.” 사람들이 읽기 어렵지 않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했다.

”좀 어렵긴 하죠. 하하, 근데 천천히 읽으면 돼요"

마치 나는 즐겁게, 쉽게, 진짜 원해서 읽은 것처럼.

참 우스운 일이다.


더 우스운 건, 내가 그토록 '척'하며 읽었던 책들이 전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거다.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타인의 의견은 네 것이 아니다."

세네카는 썼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사느라 정작 자신의 삶은 살지 못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록했다. "진정성만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는 그 문장들을 머릿속에 새기고, 메모장에 적었고, 자기 전에 다시 꺼내 읽었다. SNS에도 올렸고 유튜브에서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공감하며 좋아요를 눌러줬고 나는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다이어트 책을 100권 읽으면서 치킨은 계속 시켜 먹는 것처럼. '언젠가는', '여유가 생기면' 실천하겠다는 비겁한 유예 속에, 철학은 책장 속에 곱게 박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강록 셰프는 달랐다.


그는 결승전이라는 인생의 정점에서,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선택했다.

생각해 보라. 그 순간 그가 잃을 수 있었던 것들을. 우승자라는 타이틀, 상금, 명예.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보다 진심을 택했다.

철학은 가끔 꺼내 먹는 비싼 케이크가 아니라, 언제든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한 우동 한 그릇 같은 것이어야 함을. 그는 우동 국물처럼 뜨겁고 진솔한 방식으로, 온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그 진심 어린 고백이 담긴 우동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은 결국 시리즈 최고의 요리가 됐다.

나는 그날 밤, 오랫동안 침대에서 뒤척였다.

다운로드.png (출처-넷플릭스)


2026년의 시작과 함께 마주한 이 장면은, 내게 큰 울림을 줬다.

나는 이제 '척'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한다. 화려한 조림 요리는 아닐지라도, 내 영혼이 담긴 진솔한 우동 한 그릇 같은 삶을 끓여내고 싶다.

이 길은 가끔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무기를 내려놓은 전사처럼 무시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기준에 맞춘 행복은 결국 모래성일 뿐임을 이제는 안다.

"요즘 뭐 읽으세요?”

만약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 다면 잠시 망설이다가, 웃으며 말할 것이다.

"요즘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 읽어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것만이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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