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주인을 만난 지 어언 20여 년,
지금은 이 집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여태 날 버리지 않고 지켜준 주인이 의리 하나는 끝내준다.
내가 또 주인 복은 좀 있나 보다.
다른 사람 같으면 난 벌써.. 상상도 하기 싫다.
그렇다고 맘 편하게 있는 것은 아니다.
벌써 나를 안 찾은 지가 몇 년이나 됐는지 아나.
그때 몇 년 만에 한 번 입더니,
여태 나를 안 찾는다
주인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참담한 신세로
오늘도 난 옷장에 갇혀 있다.
지난번 옷 정리할 때 주인은,
날 한참을 들고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너를 어떡하면 좋으니? 하고 내게 물었다.
...'나야 뭐 당연히, 뭘 어떻게?' 하고 말하고 싶었다.
내게 묻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이었다.
그러고는 딸을 불렀다.
”이 옷은 아빠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사준 건데.. 진짜 비싼 옷이거든.
버리기는 아깝고 놔두기는 뭐 하고 입지도 않으니 어떡하지??
그러자, 딸은
“그냥 기념품이다 생각해."
주인은 다시 날 바라보며,
“ 도대체가 너를 어쩌누? 너를 내 옷장에 놓고 보기가 역겹다. "
그러더니,
"딸, 이거 네 옷장에 넣어두면 안 될까? 내 눈에 띌 때마다 고민스럽네.”
그래서 나는 졸지에 주인 옷장에서 딸 옷장으로 강제이사를 했고,
그 옷장의 어린것들 눈치 보며,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가끔 어린것들이 주인 딸의 선택을 받고 나를 무시할 때면,
난 그 옛날 우리 주인이 나를 신주 모시듯 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때 주인은 결혼을 하기 전이라 참 이곳저곳 여행을 많이 다니고 매일 외출을 할 때마다 나를 찾았다.
주인의 온기를 느끼며 외출도 하고 여기저기 바깥세상에 재미난 것들을 구경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인은 나를 입고 뽐내기를 좋아했다.
아마 이 옷장 어느 옷도 나만큼 주인과 함께 한 옷은 없을 거다.
그렇게 주인의 총애를 받던 어느 겨울, 주인의 배가 전보다 많이 나오는다 싶더니
그새 결혼을 했는가 보다.
나는 날씬하게 이쁘게 입어줘야 하는데.. 살짝 불만이 생겼다.
나는 코트에게
“야, 폼 안 나게 시리 이게 뭐냐? 아 놔?”
코트 왈,
"이제 정말 우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야.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를 잘 찾지도 않을걸.
그냥 편한 옷만 찾고, 어쩌다 한번 외출할 때 빼고는 말이야.
그러다가 후딱 몇 년 지나 봐, 유행이다 뭐다 하면서 우리를 내다 버리려 할걸."
...
때로 고깃집을 가면 고기 냄새가 잔뜩 봬어서 베란다에 쫓겨날 때 투덜 되곤 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주인의 손길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옷장 안에서 나보다 제일 비싸고 가장 사랑받는 옷 있으면 나와 보라고.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이렇게 나는 꼰대가 되고야 말았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왜 이리 내 시대는 오지 않는단 말인가!
나의 유일한 히든카드는 그래도 다시 유행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거다.
우리 주인과 함께 오색찬란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다시 주인을 만나려면 그때까지 주인이 날 버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우리 주인이 가난해져야 나를 그래도 찾아주지 않을까? 이런 몹쓸 생각도 해본다.
아무리 비싼 값어치가 있어도 시대를 잘 만나야 인정을 받고
유행이 지나면 가치가 없어지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가 보다.
다음 세상에는 내가 주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러면 나는 기념으로라도 남편과의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일 년에 한 번은 꼭 찾아 줄 테니까.
아 내가 지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제 또 옷정리를 또 할 텐데....... 우짠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