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소나기가 내린 후 맑게 갠 듯

'양치는 언덕'

by 블랙 펄

양치는 언덕 – 미우라 아야꼬

<빙점>, 이후 후기작 <양치는 언덕>, 외 다수.

노벨 문학상 수상

이 작품은 아주 오래전 30여 년 전인 십 대에 읽었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다시 찾아 읽게 된 데에는 ‘미우라 아야꼬’라는 작가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크리스천의 사랑 실천과 작품 활동을 통한 전도를 하는 등 그녀의 특이한 이력에 관심이 갔다. 특히 일본은 온갖 만신이 존재하는 곳으로 이름만 갖다 붙이면 신이라고 믿는 족속들이라 지구상에서 복음을 전파하기에 가장 힘든 곳이라고 들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살다가 어느 날 특이병으로 십여 년을 환자로 살게 된 그녀를 옆에서 끝까지 짝사랑하며 바라만 보던 이가 있었다. 그녀는 병상에서도 남자들의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능력 있는 여자인가. 그 많은 경쟁자를 다 물리치고 끝까지 참고 견딘 남자가 드디어 그녀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참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그녀가 얼마나 좋으면 환자인 그녀를 지켜주고 그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그 남자도 대단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압도적인 매력이 그를 그렇게까지 붙들어 놓았으니 능력자임은 분명하다. 아무튼지 간에 미우라 아야꼬가 이런 사람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그저 ‘양치는 언덕’ 표지에 여주인공인 나오미가 너무 이뻐서 책장을 넘기게 된 나는 그만 푹 빠져서 단숨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아름다운 여고생 나오미가 전학을 오게 되면서 짝꿍이 된 교코, 그리고 교코를 못살게 구는 부잣집 딸 데루꼬, 이 세 학생의 담임인 26세 독신이며 인기남 다께야마, 그의 친구이며 교코의 오빠 난봉꾼 로오찌. 그리고 나오미 아버지인 목사 고스케.

아름다운 미모에 신비스러움까지 겸한 나오미가 여고로 전학 오면서 전교 학생들은 그녀에 대한 호기심과 시기 질투가 발동한다. 수업 시간에 딴생각만 하고 책도 안 보고 필기도 안 하자 담임 다 깨야마는 그녀를 혼내주려 하는데... 그녀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며 친구들과 선생님을 놀라게 한다.

그렇게 여고 생활은 시작되었다.

늘 덤벙거리는 엄마지만 신도들 이름은 까먹지 않는 엄마와 한 번도 야단을 친 적이 없는 목사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진짜 딸일까 의심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오미를 전적으로 존중하고 믿는 분위기이다.

여고생 나오미가 삿포로로 전학을 오고 아버지가 목사인 것을 왠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어하는 눈치이다. 사춘기가 늦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왠지 아무하고도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늘 조용하다. 수업 시간에도 창밖만 보고 집중하지 못하자 담임이 주의를 준다. 담임이나 같은 반 친구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질리고, 그녀의 태도에 왠지 무시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데루꼬가 교코를 갈 시 하자 나오미는 교코를 편들어주면서 우연히 빵집에 가게 된다. 거기서 교코의 오빠 로우찌를 처음 보게 된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된다. 나오미는 혼자 바람 쐬러 바닷가를 간다. 거기서 로오찌와 교코 그리고 다 깨야 마를 만난다. 교코와 다 깨야 마는 마치 연인같이 보인다. 나오미는 자연스럽게 로오찌와 짝을 이루며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로오찌의 장난기와 아이 같은 천진함에 나오미도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로오 찌는 나오미에게 첫눈에 반해 어떡하든 그녀를 꼬셔보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담임인 다 깨야마는 어쩐 일인지 나오미네 교회에 주말마다 나오게 된다. 물론 나오미를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실지로 그렇게 자주 마주치거나 함께 이야기를 하지는 못한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로오찌가 교회를 찾아왔다. 멀리 떠나게 되었다고....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나오미에게 좋아한다며 마음을 전한다. 다 깨야마는 왠지 불안함을 느끼지만 시원하게 입을 열지 않는다. 로오찌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만 친구이기에 다 까발릴 수 없는 어려운 입장에 놓인다. 거기다 나오미 부모는 로오 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러자 나오미는 반항심만 생기고 천진한 로오 찌를 보호하고 싶어 지면서 그만 집을 나와버린다. 그리고 전근을 간 로오찌의 2층 하숙집에서 아주 초라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렇게 2년여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로오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180도 바뀐다. 그녀가 알고 있던 것들은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 천진한 눈동자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매일 밤 술에 쩌들어 술주정을 하고 기분 상하는 게 있으면 손찌검도 하고, 상을 들러 엎기도 하는 난폭한 사람이다. 나오미가 예전에 알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싫어해서 외출도 금지되어 있다. 점점 빛을 잃어가는 나오미....


결국 바람둥이 로우찌는 나오미의 친구 데루꼬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 둘의 사이를 알게 된 나오미는 삿포로로 돌아온다. 나오미를 사랑하는 다 깨야마는 교코 때문에 나오미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나오미를 만나러 온 로오 찌는 각혈을 하고 쓰러져 교회 목사관에서 병간호를 받는다. 그 와중에도 데루꼬는 로오 찌를 찾아오고. 그런 그들을 경멸하는 나오미. 그녀와 로우찌의 관계는 아슬아슬하다. 로우찌가 병이 완전히 나으면 나오미는 바로 헤어질 결심을 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다. 계속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전하며 자신의 비밀까지 밝힌다.

로오 찌는 그런 부모님들과 생활하면서 조금씩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나오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나오미를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로오찌. 그러나 데루꼬가 계속 연락이 오자 관계를 확실히 끊기 위해 크리스마스이브 날,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한다. 데루꼬는 로오찌가 아무래도 넘어오지 않자 술에다가 수면제를 탄다. 보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로오 찌는 유혹을 뿌리치고 나간다. 그러나 오랜만에 술을 마신 데다가 안개가 끼고 택시를 잡기 힘들어지면서 길바닥에서 동사를 한다.

그것도 모르고 밤 12시가 돼도 돌아오지 않는 로오 찌를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며 몸서리치던 나오미는 아침나절에야 겨우 잠든다. 전화벨이 울린다. 로오찌의 죽음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모인다.

그의 그림을 보고 로오찌의 진심을 알게 된 나오미는 그제야 울부짖는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로오 찌의 그림은 보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준다.




로오 찌는 참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그림의 영감을 위해서는 술을 마셔야 했고 아무 여자나 취하는 것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감정만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오미를 좋아했지만 그전에 만났던 여자들하고 별반 다르지 않게 연애를 했고 책임은 지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도 아주 쉬웠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고 술을 마시면 여자를 만나고 아무 죄책감도 없이 살던 그가 180도 변한 것이다. 그는 데루꼬가 가지고 온 술을 몇 개월 동안 안 마시고 장롱에 넣어 놓는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 나오미만을 오직 바라보며 그림에 온 정열을 쏟는다. 마치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살아온 인생 같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그는 모든 것을 죄 사함 받고 평안함을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사실 많이 아쉽다. 서로 깊이 사랑하고 사랑을 받아야 할 때 마음이 엇갈린다. 이기적인 로오찌 때문이긴 하다만. 그리고 로오찌의 잘못으로 나오미가 비뚤어지고 나서는 로우찌가 제정신이 되었다. 이렇게 서로 옥신각신 마음의 합을 이룬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점이 참 아쉽다. 그리고 데루꼬의 뿌리치기 힘든 유혹에도 오직 나오미만을 생각하며 돌아오는 장면에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런 로우찌의 마음을 나오미가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편하게 이들을 놔두지 않는다. 언제나 죄책감으로 가슴에 맷돌 하나씩 얹혀놓기 좋아하는 탓에 나오미도 남은 평생 후회와 한숨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충분히 살려두고 이기적인 로우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을 마감함으로써 더 이상 이생에서의 방황과 고뇌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정말이지 누구의 삶이 더 나은 삶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로우찌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가 죽기 전에 정신 차리고 참 지 편한 놈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양치는 언덕에서 다까야마와 나오미의 모습에서 덧없는 슬픔을 느꼈다.

다 깨야마는 용기가 없고 나오미는 진짜 남자 볼 줄 모르고 답답한 고구마 사이 같다.

30년 전, 그때는 로오찌와의 연애가 설레고 충격이었다. 데루꼬와의 정사는 자극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읽으니 너무나도 약했다. 하하

한 여름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금방 멈춘 후 더위가 식혀진 뽀송하고 맑아진 깨끗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의 소설이었다. 죄 사함 받고 말끔히 씻긴 듯한 ~~~

어릴 적 그 느낌 그대로 느꼈고 만화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글이었다. 인간의 원죄에 대한 고뇌는 끊임없이 우리들의 고민거리일 테니까.



이번에는 빙점에 이어 연타로 양치는 언덕을 읽었다. 실지로 작가는 빙점을 쓰고 양치는 언덕을 썼다. 30년 전 나는 양치는 언덕을 읽고 빙점을 읽었었다. 더 중요한 점은 둘 다 원죄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미우라 아야 고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아는 바 없다. 무슨 인연이지 모르겠지만 30년을 잊지 않고 일본 하면 오직 미우라 아야 고를 기억했던 것은 일본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는 일본에 대한 선입견도 녹여줄 정도로 큰 영향을 내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일본에 간다면 삿포로에 가고 싶기까지 했다. 그만큼 작가가 어떤 글을 쓰느냐 또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는 많은 독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첫눈에 반할 정도의 미인은 도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 내 중학교 짝꿍이 있었다. 그녀는 눈썹이 얼마나 풍성하고 길었는지 모른다. 여태껏 살면서 그렇게 숱이 많은 긴 눈썹을 본 적이 없다. 거기다 콧날도 오뚝하고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아이였다. 그녀도 전학을 왔었고 예뻤고 인기와 시샘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마음도 착하고 공부도 잘했다. 고등학생 때, 나는 어쩌면 그녀를 나오미라고 상상하며 읽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