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언니와 나는 10년 차다.
형제들이 많은 집에서 큰 딸로 태어난 언니는
엄마가 없을 때, 의례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동생들을 돌보는 것도 모두 언니의 몫이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언니는 내게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막내인 나를 '애기'라 불렀고,
안아주고 업어주며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른다.
나 또한 언니가 좋아서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게다가 너무 멀리 가버렸다.
지도에서 보면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이었다.
도대체 왜 그리 멀리 가버린 걸까?
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 너무 짧았다.
언니는 명절 때만 집에 왔다.
그때마다 정류장 근처에서 기다렸다.
한 번은 반나절 동안 기다린 적도 있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다가 오지 않자, 서있기가 힘들었다.
근처에 벽돌이 있어서 기대려다가 그만 미끄러졌다.
급기야 손목에서 피가 났다.
영광의 상처~!
언니를 기다리다 상처까지 입었으니,
내 맘을 충분히 어필하기에 이만한 게 또 있을까?
어린애가 이런 앙큼한 발상까지 하다니.
결국 언니는 하룻밤이 지난 다음 날 오후,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 집에 도착했다.
괜히 오버해서 고생만 했다.
명절 내내 꽤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아마도.
명절이 끝나면 또 헤어져야 되는 끔찍한 시간이 오기 마련이고
그건 어차피 일 년에 2번씩 매번 반복되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엄마와 나는 부산에 갔다.
큰 언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너무 신이 났다. 그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을 충분히 보상받을 거 같은 기분이랄까.
그러나 김치 국물부터 실컷 마신 탓에 속이 쓰릴 줄은 몰랐다.
막상 가보니 언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저녁에 잠깐 보고 잠을 자야 하니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심통이 났고 급기야 언니한테 짜증을 냈다.
얼마 후, 집에 돌아왔을 때 난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
그렇게 좋아하고 보고 싶은 언니한테 짜증 내고 심통 냈던 게 몹시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기껏해야 그립거나 보고 싶거나? 했을 텐데...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과 성질을 부려 미안한 마음까지 추가되서 더 괴로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도 한창 청춘이었을 텐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때서야 깨달았다.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는 이렇게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가슴팍에 꽂혔다.
그 후로 나는 정말로 있을 때 잘하려 한다.
주어진 이 시간이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그래야 미련이 남지 않는다.
어찌 보면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것일지도.